[스포츠투데이 윤상길의 스포츠톡톡] 무릇 모든 경기는 대등한 실력을 가진 팀(선수)끼리 승부를 겨뤄야 볼만하다. 승패가 뻔한 경기에 열광할 관중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메이저가 있고, 마이너가 있다. 1군과 2군이 있고, 체급별 경기도 있다. 대등한 경기로 관전의 몰입도를 높이기 위한 구분이다.
두 팀의 실력이 엇비슷할 때, 승패는 그날의 선수 컨디션에 의해 좌우되기도 하고, 감독 코치의 용병술로 결판날 때도 있다. 홈그라운드의 이점처럼 관중의 응원도 한몫을 한다. 하지만 운(運)도 무시 못 할 요소로 작용한다.
운은 박빙(薄氷)의 경기일 때 더욱 빛을 발휘한다. 여러 번의 슛이 번번이 골대를 맞고 나온다거나, 공이 링 주위를 빙그르르 돌다 밖으로 떨어지기 여러 차례, 점수 차가 1점을 벗어나지 않는 박빙의 승부를 연출할수록 운은 무엇보다 귀중한 승부수다. 운이 따르지 않으면 불운(不運)의 팀이 된다.
한국축구대표팀 손흥민 선수는 경기 중 좋은 결과에 동료들과 기뻐하기도 하고, 나쁜 결과에 아쉬워 하기도 했다. 이처럼 운동선수들은 경기 결과에 따라 일희일비 하게 된다. / 사진=스포츠투데이DB
박빙이 예상되는 경우에 해설자는 경기 시작 전 이렇게 말한다. "승리의 여신은 과연 어느 팀의 손을 들어줄까?"라며 흥미를 돋우고 긴장감을 더해준다. 또 운이 없어 패배한 팀에 대해서는 "다 이긴 경기였는데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승리의 여신이 외면했다"라고 아쉬움을 전한다.
'승리의 여신이 미소짓다'(The Goddess of Victory smiled)라는 표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여러 나라에서 사용했다. 박빙의 경기에서 어김없이 등장한 문구이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한국축구는 8강전에서 주최국이자 축구의 종주국인 영국과 연장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1:1로 승부를 가리지 못한 채 피 말리는 승부차기에 들어갔다. 한국의 골키퍼 이범영이 영국의 5번째 키커 스터리지의 슛을 멋지게 막아냈을 때 영국 방송의 캐스터는 "승리의 여신은 한국에 미소를 보냈다"(The Goddess of Victory smiled upon Korea)라고 풀 죽은 목소리로 한국의 승리를 점쳤다.
선수는 물론 수많은 관중을 울리고 웃기는 '승리의 여신'은 누구일까.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화에 따르면 이 여신의 이름은 '니케'(Nike). 신화의 주신(主神)인 제우스와 그의 딸인 아테나를 보좌하는 계급이 낮은 여신이었다.
하지만 로마 신화로 넘어오면서 니케의 지위는 높아진다. 로마 원로원을 수호하는 여신으로 격상된다. 그의 이름은 로마식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많은 여성들이 사용하는 '빅토리아'(Victoria)로 장수하고 있다. 유명 걸그룹 에프엑스의 멤버 빅토리아의 이름도 여기에서 따왔다. 뿐만 아니라 영어의 '승리'(Victory)라는 단어도 니케에서 파생됐다.
신화시대의 그리스나 로마에서의 가장 중요한 정치는 '전쟁'이었고. 그 목표는 '승리'였다. 그런데 니케는 '전쟁의 신'은 아니었다. '아레스'(로마신화에서는 '마르스')라는 전쟁의 신이 따로 있었다. 따라서 니케는 전쟁 자체보다는 '운이 따르는 비등한 승부에서 결정을 내리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니케는 '전쟁의 신'보다는 '승리의 여신', '행운의 여신'이 더 중요한 오늘날에 이르러 박빙의 모든 경기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기에 이르렀다.
승리의 여신 니케의 위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신화가 역사로 바뀐 이 시대에 니케는 자본주의 첨병의 얼굴로 등장하고 있다. 바로 세계적인 스포츠용품 전문 브랜드 '나이키'로 옷을 갈아입었다. '나이키'는 '니케'의 영어식 발음이다.
수많은 패러디를 낳은 유명한 장면으로 니케상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사진=영화 '타이타닉' 스틸이미지.
나이키란 브랜드가 처음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71년. 일본 운동화를 수입 판매하던 미국 회사 블루리본 스포츠(ERS)가 전신으로, 이 회사의 첫 직원이었던 제프 존슨이 '니케'에 관한 꿈을 꾸고 회사의 이름을 '나이키'로 제안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한국에 나이키 브랜드의 상품이 소개된 때는 1986년이다.
'나이키'란 브랜드가 처음 등장한 해에 나이키의 트레이드마크인 스우시(Swoosh, 나이키 제품 로고의 이름)도 만들어진다. 스우시는 당시 포틀랜드 주립대학의 그래픽디자인학과 여학생 캐롤린 데이비슨이 35달러를 받고 만들었다.
모든 나이키 브랜드의 로고로 쓰이는 스우시 디자인의 탄생에 대해서는 대략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니케의 날개를 형상화했다는 설이다. 니케의 유명한 조각상인 '사모트라케의 니케'의 형상을 이미지화하여 로고 작업을 했다는 것. 이 니케상은 1863년 프랑스 아마추어 고고학자 샤를 상푸아소 여사가 에게해 북서부 사모트라케섬에서 발견했다.
'포청천' 주인공 '포증'의 이마에 새겨진 초승달 표식. / 사진=중국 드라마 '포청천2011'
'사모트라케의 니케상'은 프랑스의 세계적 박물관인 루브르박물관에 '밀로의 비너스', '모나리자'와 함께 '루브르 3대 예술품'의 하나로 소장 전시되고 있다. 이 니케상에서 영감을 따온 것은 나이키뿐만이 아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1997년 영화 '타이타닉'에서 남녀(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가 취한 멋진 포즈도 이 니케상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또 다른 설은 캐롤린 데이비슨이 디자인의 영감을 얻기 위해 캠퍼스 운동장에 들렀다가 선수들이 가속도를 얻는 육상 트랙의 코너 모양에서 착안했다는 설도 있다. 나이키 측은 이 두 가지 '설' 모두가 로고에 녹아 있다는 입장이다.
이 로고와 얽힌 '믿거나 말거나' 일화 하나 소개하자. 나이키가 명품 브랜드로 국내에서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이 로고를 본 몇몇 사람들 사이에서 "나이키 로고는 중국 드라마 '포청천'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황당무계한 소문이 떠돌았다.
'포청천'은 중국 송나라 때의 명판관인 '포증'을 소재로 1993년에 중국에서 제작 방송된 TV드라마다. 우리나라에서는 KBS 2TV를 통해 1994년 10월 14일부터 1996년 10월 11일까지 '판관 포청천'이라는 제목으로 방송했다.
대만 배우 진차오췬(금초군)이 맡은 '포청천' 주인공 '포증'은 "작두를 대령하라"는 대사와 함께 검은 얼굴의 이마에 초승달이 새겨진 표식으로 유명해졌는데, 이 초승달 표식이 나이키의 로고와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러나 나이키 로고가 등장한 때는 1971년이고, '포증'의 초승달 표식이 방송에 모습을 보인 것은 그보다 20년이 더 지난 후의 일이니, 이 닮은꼴 시비는 의미가 없어 보인다. 포증은 실존인물이기는 하나 관련 기록에서도 "양미간 사이에 초승달은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신화'는 곧잘 '현실'로 나타난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재현되기도 하지만 이처럼 스포츠를 통해서 우리 곁에 다가온다. '승리의 여신 니케'는 "한발 앞선 창의력과 탐구 정신에 미소를 보낸다"는 교훈과 함께 "치열하게 한 분야에서 몰두했던 노력과 열정적인 삶의 태도로 성공의 기회를 만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셈이다.
스포츠투데이 윤상길 편집위원 sports@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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