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강태구 기자] 여자 프로배구 흥국생명은 올 시즌을 앞두고 주전 세터를 바꿨다.
지난 시즌 주전으로 뛰었던 이원정과 2025~2026시즌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을 페퍼저축은행에 내주고 이고은과 페퍼저축은행의 2205~2026시즌 2라운드 지명권을 받아왔다. 세터를 바꿈으로써 확실한 팀 컬러 변화를 선택한 셈이다.
이고은은 2013~2014시즌 신인 드래프트 전체 3순위로 도로공사의 지명을 받아 V리그에 데뷔했다. 벌써 프로 11년차의 베테랑이 됐다. 흥국생명의 전지훈련이 열리고 있는 상하이에서 이고은을 만나 트레이드에 대한 소회와 앞으로의 각오 등에 대해 들어봤다.
이고은은 프로 11년차라는 얘기에 "시간이 참 빨리도 흘렀다. 아직 크게 뭔가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진짜 금방 지나갔다. 어느덧 한국 나이로도 서른이 됐다"며 웃었다.
이고은은 V리그 여자부의 대표적인 '저니맨'이다. 데뷔팀인 도로공사를 거쳐 IBK기업은행(2016~2018), GS칼텍스(2018~2020), 도로공사(2020~2022), 페퍼저축은행(2022~2024)를 거쳐 흥국생명이 다섯 번째 팀이다. 지난 시즌엔 박정아의 보상선수로 페퍼저축은행에서 도로공사로 옮겼다가 다시 페퍼저축은행이 트레이드로 재영입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이고은은 "처음에 페퍼저축은행에서 보호 선수 명단에서 제외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참 속상하기도 했다. 페퍼저축은행에서 도로공사, 그리고 다시 페퍼저축은행으로 돌아가게 될 때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는 있었지만, 되게 정신이 없긴 했다"라면서 "결국 다시 페퍼저축은행에 남게 되었을 때는 그만큼 나를 신경써준 거니까 금방 다시 마음을 잡았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이고은을 둘러싼 보호선수 명단 제외, 그리고 재트레이드 과정에서 페퍼저축은행은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을 잃었고, 그게 도로공사의 김세빈 지명으로 이어졌다. 이고은 본인의 잘못은 아니지만, 팬들은 이고은을 탓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고은은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에 대해서 내가 속상해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다만 아쉬웠을 뿐이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신경쓰지 말자고 되뇌였다"고 말했다.
도로공사에서 흥국생명에 오기 까지 7번의 이적을 경험했다. 자리를 잡을 법하면 트레이드된다는 게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닐 것이다. 이고은은 "트레이드에 좀 초연했던 것 같다. 그만큼 팀들이 저를 원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이런 상황들이 벌어진다고 생각했다"면서 "결과적으로 봤을 때 트레이드되고 나서 상황이 좋았다. 트레이드되면 그 팀들이 다 봄배구를 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의 선수 이고은의 이미지는 팀에 있으면 분명 도움이 되는 선수, 하지만 우리가 다른 팀에 원하는 카드가 있을 때 트레이드를 할 수도 있는 선수였던 셈이다. 이런 양면의 이미지는 선수로서 집중하기에 힘들 수도 있다. 이고은은 "그런 쪽으로 생각을 파고들면 속상해질 수도 있지만, 성격적으로 그렇게 연연하는 스타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흥국생명으로의 트레이드를 처음 들었을 때, 이고은은 좋았다고. 그는 "그냥 좋았다. 어느 정도 예상도 했었고, 여기저기에서 트레이드설이 살짝 들리기도 해서 조금은 예상을 하고는 있었고, 마음의 준비도 나도 모르게 조금씩 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내게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막내구단인 페퍼저축은행의 목표가 탈꼴찌였다면 '배구여제' 김연경을 보유한 흥국생명은 V리그 여자부 최다 우승팀이자 올 시즌에도 우승을 노리는 팀이다. 주전 세터로서 책임감이 더 클 법 하다. 이고은은 "우승을 노려야 하는 팀에 왔다는 게 동기부여가 되기도 하면서 부담이 되기도 한다. 그만큼 세터가 중요한 포지션이기도 하니까. 무엇보다 연경 언니랑 함께 뛴다는 게 영광이기도 하다. 잘 해서 봄 배구도 가고, 우승도 하고 싶다. 제가 세터라는 포지션에서 그만큼 해줘야 한다는 얘기니까 부담감도 없진 않다"고 설명했다.
흥국생명은 여자부 내에서 팬덤이 가장 강한 팀이다. 잘 하면 무한한 찬사를 받겠지만, 부진하면 더 큰 비난과 마주해야 한다. 이고은은 "저는 저를 비난하는 댓글이나 DM을 안 보기 때문에 그런 것에는 그리 큰 부담을 느끼진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지난 시즌 페퍼저축은행에서 조 트린지 감독을 경험했기에 또 다른 외국인 감독인 마르첼로 아본단자 감독을 대하는 게 어렵지 않은 이고은이다. 그는 "감독님이 지시하실 때 목소리가 엄청 큰데, 아직 괜찮다. 아본단자 감독님의 스타일이 좋다"라면서 "아본단자 감독님이 워낙 주문하거나 전술상 지시를 많이 하는데, 그런 것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그리 걸리지 않았다. 조 트린지 감독과 스타일은 상반되지만, 외국인 감독님을 대해봤다는 경험이 흥국생명에 와서 아본단자 감독님을 대할 때도 더 수월하고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아본단자 감독님은 정말 머리를 써서 하는 배구를 원하신다. 잘 해내고 싶다. 그걸 해낸다면 선수로서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고은은 팀 내의 다른 세터들인 박혜진, 김다솔, 서채현과 함께 세터 인스터럭터로 이번 전지훈련에 동행 중인 이숙자 KBSN 해설위원과 함께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 전지훈련 첫날엔 넘어질 법한 상황에서도 B속공이나 퀵오픈을 쏘는 연습을 한참 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나쁜 볼에도 리시브가 잘되어 올라온 공을 토스할 때처럼 그 속도와 구질을 구사하기 위한 연습이었다. 시즌에 들어가서도 오픈 상황이나 리시브가 나쁠 때도 오픈 토스로 붕 띄우기 보다는 잘 세팅된 공격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시즌 흥국생명의 약점 중 하나는 미들 블로커의 공격 활용이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고은도 미들 블로커 활용보다는 양 사이드로 빠르게 토스하는 플레이를 선호하는 세터다. 이고은은 "맞다. 원래 선호하는 플레이는 양쪽을 빠르게 쓰는 것이다. 그래도 미들 블로커나 아웃사이드 히터들의 중앙 후위 공격을 최대한 활용하는 훈련들을 가장 많이 하고 있다"면서 "내 스타일을 버리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감독님이 추구하는 배구가 큰 틀에선 제가 하고 싶었고, 배우고 싶었던 배구랑 비슷하다. 그래서 그걸 잘 따라가고 싶다. 저만 잘 하면 된다"고 말했다.
올해 이고은은 한국 나이로 서른이 됐다.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때때로 실감하는 중이다. "연경언니나 수지언니를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제가 이제 서른이 된 건데도 확실히 20대 초반에 막 뛰어다니던 거랑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근데 언니들은 저보다도 훨씬 그런 걸 느끼실텐데도 훈련을 같이 하고 몸 관리를 한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고 말했다.
올 시즌을 마치면 이고은은 다시 한 번 FA 자격을 얻는다. 그는 "시즌 시작도 안했지만, FA에 대한 생각이 없진 않다. 우선 흥국생명의 통합 우승에 기여하고 싶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FA 시장에서도 저의 가치도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가올 시즌에 대한 각오를 들려달라고 말하자 이고은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달라진 저를 보여드리고 싶다. 제가 지금까지 했던 플레이 스타일을 버리고, 이제는 정말 팀을 이기게 하는 세터, 배구를 잘 하고 싶다"
[스포츠투데이 강태구 기자 sports@st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