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임시령 기자] 정일우가 '거미여인의 키스'로 자신의 스펙트럼을 증명했다. "배우는 안주하지 않고 발전하려고 해야 롱런할 수 있어요"라는 소신이 그의 새 얼굴들을 기대하게 한다.
'거미여인의 키스'는 아르헨티나 작가 마누엘 푸익이 1976년 발표한 동명 소설을 무대로 옮긴 작품이다. 자신이 여자라고 믿는 성소수자 몰리나와 냉철한 반정부주의자 정치범 발렌틴이 감옥에서 만나 서로를 받아들여가는 과정 속에서 피어나는 따뜻한 인간애와 사랑을 다뤘다.
정일우는 극 중 성소수자 몰리나 역을 맡았다. 자신을 여자라고 믿고 있는 낭만적 감성의 소유자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이번 작품 속 정일우의 모습은 그간 작품들에서 보여줬던 '상남자'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정일우는 "기존에 하지 않았던 캐릭터였다. 어려운 작품이라 주변에서 안 했으면 하는 얘기도 있었다. 고민하던 차에 정문성 배우가 발렌틴 역할을 하셨는데, '인생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작품이다. 하게 되면 많은 걸 느낄 것'이라는 말에 큰 용기를 내 도전했다"고 출연 이유를 밝혔다.
사랑의 애절함, 쓸쓸함. 작품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에도 끌렸단다. 하지만 자신이 여자라고 믿는 몰리나의 사랑은 정일우에게 수수께끼와도 같았다. 몰리나를 이해하기 위한 과정은 치열했고, 험난했다고.
정일우는 "두 달 반 가량을 고민을 많이 하고, 연습도 무수히 많이 했다. 혜화동에서 지하철 타고 왔다 갔다 하면서 아침부터 밤까지 고민을 했다"며 "대체 몰리나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 뭘까였다. 작품을 올리기 전에 '멘붕'이 왔다. 이성과 호기심에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다른 차원의 사랑인 것 같더라. 정문성 선배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봤다. '모성애에 가까운 사랑이지 않을까'라고 듣는 순간 그게 정답이 됐다. 발렌틴을 위해 나를 희생하고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게 어머니에게 받는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이해했다"고 털어놨다.
몰리나의 사랑을 이해한 뒤로부터는 그의 걸음걸이, 목소리톤, 손짓 등의 동작은 자연스럽게 체내화됐다. 과도한 여성스러움이 아닌, 유리알처럼 깨질 것 같은 유약함, 섬세함은 몰리나 그 자체였다.
거미여인의 키스 정일우 / 사진=스튜디오252 제공
인터뷰 당시엔 몰리나로서 25회 차 이상 무대에 올랐던 때. 정일우는 "부족한 점이 많은 배우라고 생각한다. 딕션이 좋은 배우들이 있는 반면, 저는 그런 부분에서 부족하다고 생각해 노력으로 채우고 있다. 그런 부분에서 좋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20회차 쯤엔 매너리즘에 빠져있었다"고 털어놨다.
"내가 잘 가고 있는 건가라는 불안함도 있었다"는 정일우는 "그걸 깨는 것도 제 몫이다. 무작정 대사 연습을 했다. 다른 방법이 없더라. 몰리나가 돼 연기했을 뿐이지. 저를 많이 배제하고 몰리나로서 연기하려고 노력했다"고 얘기했다.
정일우는 그만큼 몰리나에게 빠져있었다. 인터뷰 동안에도 언뜻 몰리나의 말투, 손짓이 엿보이기도 했다. 그는 "몰리나가 굉장히 부럽긴 하다. 1960년대 시대상 어쩔 수 없는 제약이 있지 않나. 그럼에도 생각 자체가 깨어있는 사람이구나. 나도 이렇게 살아가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관객들도 이런 부분에서 위로를 얻고 있는 것 같다. 남자 둘의 사랑 이야기로 나누기보다는 사랑이란 메시지를 갖고 있는 작품이라 많은 관객분들이 좋아해 주시는 것 같다. 몰리나 같이 맹목적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고 솔직히 말했다.
이어 "저는 굉장히 겁이 많고,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다. 항상 걱정이 앞선다. 앞에선 당당한 척 하지만 혼자 있을 땐 동굴 속으로 파고드는 겁쟁이 같은 사람이다. 저도 사랑하면 올인하는 스타일인데, 그게 일방적으로 안되지 않나. 그래서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거다. 아마 그런 사랑을 만나면 결혼하지 않을까"라며 웃었다.
거미여인의 키스 정일우 / 사진=스튜디오252 제공
정일우는 마지막 공연까지 수많은 고민과 연습으로 완성도를 높였다. 드라마, 영화와 달리 관객과 가까이 호흡하며, 연기 내공을 쌓고 있는 중이다. 2010년 '뷰티풀 선당'로 첫 연극에 출연한 뒤 꾸준히 무대를 찾는 이유기도 하다.
정일우는 "완성이 됐다고 말하긴 그렇지만 매회 공연을 하면서 부족한 것을 채워 놓으려는 게 연극의 묘미라고 생각한다. 매번 관객들의 리액션도 달라진다. 지인들에게 어떤 게 부족해 보이는지 리뷰를 많이 듣는다"며 "어느 순간부터 정일우가 아니라 몰리나 한 여인이 보이더라는 말을 해준다. 그런 부분들이 제가 도전하고 보여드리고 싶었던 부분이라 감사하다. 배우는 안주하지 않고 발전하려고 해야 롱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작품을 제안해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앞으로도 연극뿐 아니라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으면 도전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배우는 무대에 서야 한다는 이순재의 말에 적극 공감한 정일우다. 그는 "'하이킥'할 때부터 이순재 선생님이 무대에 서라고 하셨다. 그 말씀이 맞는 것 같다. 배우라면 무대에 서서 2시간가량 끌고 나가는 역량을 키우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배우로서 살아있다고 느껴진다. 평생 기회만 된다면 무대에 서서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고 눈을 빛냈다.
새로운 모습, 도전을 향한 정일우의 목표는 뚜렷했다. "개인적으로 스타는 한순간인 것 같다. 20대 초반엔 스타를 갈망하고, 데뷔작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작품이 있어 정일우가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 노력이 없었다면 이렇게 활동하지 못했을 것 같다. 모든 직업이 마찬가지다. 안주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 오랫동안 활동을 못 하는 것 같다"며 "2년 뒤에 제가 20주년이라더라. 20년 가까이 이 일을 한 건 배우라는 직업을 사랑하고, 인생의 전부이기 때문에 끝없이 노력하는 게 아닌가 싶다. 비슷한 작품은 들어오지만 그러다 보면 퇴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소신을 전했다.
"오래 일하다 보니 순간의 만족은 있지만 좋은 배우라고 느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안도할 뿐이지. 자신을 자해하듯이 해야 조금 더 나오는 느낌이 있어요. 저를 가만두지 않는 편이죠. 일할 때는 모든 것을 쏟아붓고, 쉴 때는 온전히 정일우를 위한 시간을 줘야 도전할 수 있어요. 이번 작품 끝나고 여행을 가 좀 걷다 올 거예요. 30대 후반으로 달려가는데 다녀와서 빨리 좋은 작품을 필모그래피에 채우고 싶고, 아직도 열일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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