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현혜선 기자]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는 데뷔 30년 차에도 도전을 이어가는 배우가 있다. 두려움을 딛고 마주한 첫 사극은 남다르다는 설명이다. 배우 설경구는 영화 '자산어보'를 통해 처음으로 사극에 도전했다. 그야말로 강렬한 첫 만남이다.
설경구는 영화 '박하사탕' '공공의 적' '오아시스' '광복절 특사' '실미도' '역도산' '그놈 목소리' '해운대' '감시자들' '스파이' '소원'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살인자의 기억법' '생일' '퍼펙트맨' 등에 출연하며 굵직한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이런 설경구가 데뷔 후 처음으로 사극에 도전했다. 이준익 감독의 신작 '자산어보'(감독 이준익·제작 씨네월드)를 통해서다. '자산어보'는 흑산으로 유배된 후, 책보다 바다가 궁금해진 학자 정약전(설경구)과 바다를 벗어나 출셋길에 오르고 싶은 청년 어부 창대(변요한)가 '자산어보'를 집필하며 벗이 되어가는 이야기다.
사극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던 설경구는 이준익 감독에 대한 신뢰로 용기를 얻었다. 그는 "이준익 감독과는 '소원'으로 작업을 해봤다. '소원'은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를 풀어가는 감독님의 모습이 좋았다. 또 현장을 지휘하는 감독님도 정말 좋았다. 모든 스태프가 불편해하는 걸 싫어하셨는데, 그걸 보고 큰 신뢰를 느꼈다"며 "사극을 해볼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용기가 안 났다. 그래서 미루고 미루다가 지금까지 온 거다. 내가 원래 낯선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그런데도 이걸 할 수 있었던 건 역시 이준익 감독에 대한 믿음이었다. 감독님은 배우들의 장점만 본다. 내가 익숙지 않은 한복과 갓, 수염을 달고 왔을 때도 칭찬을 많이 해줬다. 나이를 먹어도 칭찬은 용기를 갖게 만든다. 이런 격려 덕에 나도 낯선 내 모습에서 점차 자유로워졌다. 지금은 사극을 또 해보고 싶을 정도다. 흑백에서 해 봤으니까 컬러로 보는 사극의 내 모습은 어떨까 궁금해진다"고 말했다.
이렇게 '자산어보' 촬영장에 들어선 설경구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섬에서 촬영하며 태풍을 만나고, 태풍으로 인해 사람들과 더 깊이 알게 됐다고. 설경구는 "배를 타고 정말 먼 섬에서 촬영했다. 섬이다 보니 태풍에 직격타를 맞더라.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이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태풍이 오고는 2~3일 정도 촬영이 딜레이 됐다. 뒤돌아보니 이미 스태프들은 다 육지로 떠났다"고 미소를 지으며 "그런데 나는 섬에 남기로 했다. 그렇게 섬에 남은 사람이 나랑 변요한, 그리고 감독님이었다. 실제 영화처럼 서로의 벗이 됐다. 정말 낭만적이었다. 호프집에서 모여 옛날 노래를 들으며 태풍을 구경했다. 노래도 딱 내 취향이었다. 앉아서 주야장천 노래를 듣고, 비 맞은 고양이를 보고, 주인집 아이와 이야기를 했다. 이런 게 좋아서 못 떠난 것 같다"고 전했다.
이 와중에 설경구는 자기관리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매일 줄넘기를 2시간씩 하면서 연기할 수 있는 몸을 만들었다고 전했다. 그는 "영화 '공공의 적'이 끝나고 '오아시스'를 들어가기까지 두 달 정도 시간이 있었다. 그때 살이 90kg까지 쪘는데, '오아시스' 대본을 보니 지문에 '앙상한 갈비뼈'라는 게 있더라. 정말 급하게 살을 빼야 했다. 억지로 살을 빼서 촬영장에 가니 운동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최고의 실내 운동인 줄넘기를 하게 됐다. 그게 습관이 돼서 지금까지 온 거다. 칸에 갔을 때도 줄넘기를 했고, 베를린에 갔을 때도 줄넘기를 했다. 해외 나갔을 때도 필수다. 하루를 가든 열흘을 가든 똑같다. 여건이 안 되면 화장실에서라도 했다. 베란다에서 하다가 문이 잠긴 적도 있다. 습관이 된 게 지금은 감사할 정도다. 이제는 안 하고 촬영장에 가면 안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야 한다. 그렇게 돼 버렸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준비를 마친 설경구는 카메라 앞에서 흑백 화면 속 자신과 마주했다. 흑백이기에 미술 세팅은 최소화됐지만 진실한 마음은 극대화됐다는 설명이다. 설경구는 "감독님이 계속 흑백 특성상 거짓말은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어차피 해봤자 들킨다고. 그 말을 들으니 더 긴장됐다. 촬영에 들어가니 집중은 해야 했는데 긴장도 되더라. 그렇게 긴장하면서 지내다가 어느 순간에는 흑백이라는 걸 잊은 적도 있다. 흑백이라 더 집중해야 한다는 강박은 벗고 진실하게 담았다. 정성과 디테일에 훨씬 신경을 쓰게 됐다"고 전했다.
또 설경구는 '자산어보'를 통해 배우 이정은과 로맨스 연기를 소화했다. 설경구는 "이정은과는 대학 선후배 사이다. 정말 더 빨리 잘 됐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정은과는 정말 편하다. 어렸을 때 봤던 사이라 그런지 척하면 척이었다"며 "중년 배우들에게도 로망은 역시 멜로다. 사실 영화는 멜로라고 생각한다. 요즘 장르 영화가 잘 돼서 많이 나오긴 하는데, 그게 상업영화의 전체는 아니지 않냐. 나는 지금도 멜로를 하고 싶다. 시켜만 주시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사실 설경구는 영화 '불한당' 이후 '브로맨스'의 대가로 떠오른 바 있다. 정통 멜로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 관객들에게 감정을 전달한 것. 이에 대해 설경구는 "'불한당' 이후 팬들이 많이 생겼다. 대중들이 나에 대해 받는 이미지가 이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체감하는 게 분명히 있다. 이건 나에게 정말 즐거운 부분이다. 감사하기도 하고 또 나를 긴장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설경구가 유독 '브로맨스'에서 호평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설경구는 호흡을 맞춘 배우들과 친구가 되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내가 선배고 네가 후배고'라는 걸 따지지 않는다. 그냥 친구가 된다. 서로 어려워하지 않고 편하게 다가갈 수 있다. 사실 변요한도 날 처음에는 조금 어려워했다. 아무래도 내가 연식이 됐으니 그렇다. 난 선배라고 무조건 귀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저 똑같은 입장이다. 내가 다가가면 그쪽에서도 다가와 어느샌가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그럼 선후배를 떠나 동료 배우로 편해진다. 촬영장에서 편안함을 느껴야 작품이 잘 나온다. 또 이런 편안한 관계가 촬영이 끝나고까지 이어지더라. 젊은 남자 배우들과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 감사할 뿐"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설경구는 영화계에서 활약하며 '천만 배우', '브로맨스의 대가', 이제는 '최초 사극 도전' 등 다양한 수식어를 얻었다. 이는 꾸준히 활동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설경구는 영화에 대한 설렘으로 지금까지 달려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같은 대사를 재촬영하는 것도 있지만, 매번 새로운 경험이 에너지 원천이다. 이건 새로운 작품일 수 있고, 장면일 수도 있다. 걱정과 궁금증이 동반된다. 이런 설렘이 나를 팔딱팔딱 뛰게 한다. 영화라는 작업 자체가 내게 에너지를 주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어 "난 촬영을 할 때 되게 일찍 일어나서 준비한다. 아침 7시 촬영이면 새벽 3시 반에 일어난다. 일단 땀을 쫙 빼고 새로운 것을 맞기 위해 나름 최소한의 준비를 한다. 이걸 반복하면서도 지겹지 않은 이유는 호기심이다. 배역들에 대한 기대, 걱정, 설렘이 날 움직이게 만든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영화를 사랑하는 설경구다. 그는 최근 코로나19로 극장 개봉이 어려워지고 OTT 시장이 성장하는 상황 속에서도 영화에 대한 애정을 표했다. 다른 매체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아직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크다고. 그는 "아직은 영화가 좋은 것 같다. 급하게 몰아붙이면 버거울 것 같다. 영화는 촬영 2~3일 하고 며칠 쉬지 않냐. 이런 리듬에 이미 20년 동안 익숙해졌다. 내가 드라마를 하지 않아서 비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드라마가 버거운 스케줄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난 영화만 해야 한다는 생각도 아니다. 영화에도 분명 한계가 있다. 시간 내에 압축해야 하는 양이 다르다. 배우로서도 너무 점프 된 게 아닐까, 더 풀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는 드라마에 관심이 있다. 이야기만 재밌으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끝으로 설경구는 "잘 안되는 영화도 코엑스에서는 관심을 받는데 정말 관객이 없더라. 그래서 걱정이 되긴 하다. 그래도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됐고,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냈으면 좋겠다. '자산어보'가 민초의 이야기인 만큼 희망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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