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현혜선 기자] 흑백 세상 안에서는 모든 게 선명하다. 색채 대신 명암이 존재하는 곳에선 거짓이 통하지 않는다. 배우 변요한은 흑백 영화에 출연하며 거짓과 기술을 내려놓고 진실로만 채우니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내려놓음의 미학이다.
2011년 영화 '토요근무'로 데뷔한 변요한은 영화 '목격자의 밤' '감시자들' '들개' '소셜포비아'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드라마 '미생' '구여친클럽' '육룡이 나르샤' '미스터 션샤인' 등에 출연하며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이준익 감독의 신작 '자산어보'(감독 이준익·제작 씨네월드)로 스크린에 복귀했다. '자산어보'는 흑산으로 유배된 후, 책보다 바다가 궁금해진 학자 정약전(설경구)과 바다를 벗어나 출셋길에 오르고 싶은 청년 어부 창대(변요한)가 '자산어보'를 집필하며 벗이 되어가는 이야기다. 변요한은 극중 바다를 훤히 알고 있는 어부이자 이 나라를 지탱해 주는 것이 성리학이라고 믿는 창대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변요한은 단순한 울림에 끌려 '자산어보'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그는 "단순한 답인데, 단순한 게 크게 느껴졌다. '자산어보'는 아주 깊게 들어올 수 있는 영화다. 또 내가 정말 찍어보고 싶은 영화였다"고 말했다.
창대는 실존 인물이지만 역사 속에 별다른 묘사 없이 이름만 남아 있다. 창대의 성격, 행동, 모습 등은 창작된 것. 실존 인물의 허구적 삶을 재해석하는 게 부담스럽진 않았을까. 변요한은 인물의 역할에 집중했다고 밝혔다. 그는 "창대는 정약전이 얼마나 큰 그릇인지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 때문에 과감하게 표현하려고 했다. 창대가 과감해질수록 정약전의 그릇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이라며 "영화화가 되기 위해 감독님이 창대를 확장시켜서 만들어줬다. 그에게는 업이 있고, 그가 원하는 내부적인 구조에서 나오는 심리가 있다. 그만큼 뜨겁다. 뜨거운 사람 옆에 뜨거운 내가 있듯이 정약전 옆에서 더 뜨겁다. 나도 연기를 하는 동안 뜨거운 사람이 되고 싶었고, 창대도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변요한은 시나리오를 보고 창대와 닮은 점을 발견했다. 또 이를 발전시키기 위해 고민했다. 그는 "어떤 영화건 시나리오를 처음 보고 캐릭터와 나의 닮을 점을 찾는다. 뿌리를 찾는 거다. 창대와 나의 닮은 점을 발견했는데, 이걸 파생시키기 어려웠다. 계속 창대에 대해 생각해 보니 나와 닮은 점도 있고, 내 친구들과도 닮은 점이 있었다. 오히려 타인들을 보면서 창대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나도 그렇고 주변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또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누구든 반항심이 있고, 꿈과 야망이 있지 않냐. 또 야망 때문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런 지점들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나중에 창대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됐는데, 그건 현장에서였다. 결국엔 현장에 들어가서 선배들과 섞이면서 자연스럽게 창대의 마음이 생긴 거다. 또 내 마음에 창대가 들어오도록 대본이 나오기도 했다. 창대가 잘 흘러간 것 같다"고 했다.
자산어보 변요한 / 사진=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또 변요한은 '자산어보' 촬영 전 실제 역사 배경인 흑산도의 정약전 유배지를 다녀왔다고 전했다. 그는 "시나리오를 받고 자연스럽게 가게 됐다. 굉장히 멀더라. 가면서 느끼고 싶었는데 그냥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착하고 나서는 정약전 선생님의 동상과 묘비, 그리고 흑산도에 유배왔던 사람들의 명단을 봤다. 정말 멀리 오셨구나 싶어서 마음이 안 좋았다. 우연히 좋은 가이드를 만나서 정약전 선생님이 실제로 활동했던 곳들을 갈 수 있었다. 정약전 선생님이 걷던 곳을 나도 걸으면서 어떻게 하면 이분의 위대한 발자취와 조화를 이룰까 생각했다"고 전했다.
이외에도 물고기를 손질하고 전라도 사투리를 연습하는 등 변요한이 작품을 위해 준비한 건 많았다. 변요한은 "살면서 어부 역을 언제 해볼까 싶었다. 이와 관련한 수업을 받았다. 그 시대에 노 젓는 방법과 물과 가까워지기 위해 수영도 배웠다"며 "전라도 사투리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려고도 노력했다. 주변에 사투리를 구사하는 분이 있다면 남녀노소 구분 없이 사투리로 대화했다. 흑산도에서도 사투리로만 얘기했다. 그런데 또 사투리를 너무 깊게 파고들면 관객들이 못 알아들을 수 있기에 평준화된 사투리를 찾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자산어보'는 흑백 영화다. 낯설기도 하고 생소할 수 있을 터. 변요한 역시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전했다. 그는 "처음에는 정말 겁이 났다. 흑백이라서 배우의 눈빛이나 표정, 목소리, 주름 등이 도드라진다. 정말 신기하게 지나가는 벌레도 보인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게 되는 거다. 이건 거짓말로 연기하거나 기술을 쓰면 다 들통나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모니터링을 하고 과감하게 내려놨다. 완벽하지 않은 연기일지라도 기술이 아닌 진실로 가자는 마음이었다. 그러고 나니 심적인 부담이 덜했다. 두 번은 없을 좋은 기회였다"고 했다.
이렇게 내려놓으니 과거 안 좋은 연기 습관이 고쳐지고, 나아가 변요한의 삶도 바뀌었다. 변요한은 "내가 나왔던 모든 작품을 사랑하고, 전에 내가 했던 연기들을 아낀다.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적은 없다. 물론 '다른 선택을 했으면 장면이 달라졌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다. 이번 작품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다 내려놓으면서 진솔되게 연기하니 더 울림이 생기더라. '안 좋으면 어때?' 스스로 평가하게 됐다"며 "삶도 달라졌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좋은 영향을 받지 않냐. 작품에서 주는 힘이 있는데, 이렇게 좋은 작품을 만나고 좋은 어른들을 만나니 많이 달라진 것 같다"고 표했다.
자산어보 변요한 / 사진=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창대를 만나 변화한 변요한은 관객들에게 용기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단다. 그는 "꿈을 갖고 용기를 갖길 바란다. 그리고 실패해도 된다. 실패해도 멋진 것이다. 그냥 부딪혔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실수를 인정해 주고 눈감아줄 친구가 있을 것이다. 그럼 성공한 삶이 아닐까. 이게 내가 작품을 하면서 창대에게 배웠던 마음"이라고 전했다.
사극의 대가인 이준익 감독과의 작업도 남달랐다. 변요한은 현장에서의 이준익 감독에 대해 "장점만 보시고 약점은 눈감아 주신다. 이게 쉽지 않은 일이지 않냐. 어떻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다. 객관적인 눈과 주관적인 눈이 공존해야 한다. 최고의 감독님과 작업하니 모든 배우들이 즐거웠던 현장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감독님은 인물을 망원경이 아닌 현미경으로 본다. 굉장한 미시적 관점이다. 그런 지점들이 때론 소박해 보일 수 있지만, 난 훨씬 더 거대하다고 생각한다. 난 사람을 만날 때도 열 명과 함께 있는 것보다 한 명을 정확하게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 명을 친근하고 깊게 연구해 소박하지 않고 위대해 보이게 만든다"고 덧붙였다.
완성된 영화를 본 변요한은 눈물을 흘렸다. 그는 "촬영 이후 영화를 오랜만에 봐서 어떻게 나올지 정말 궁금했다. 너무 좋은 영화다. 처음 본 자리에서 부끄럽지만 눈물이 났다. 감사함의 눈물이었다. 완성된 걸 보니까 뿌듯했고, 다 같이 고생한 스태프들도 생각났다"고 말했다.
변요한은 "창대처럼 계속 마음은 청춘이고 싶다. 반항하고 방황하면서 때론 갈피를 놓치고 외로울지라도. 그러면서 일을 잘 하고 싶다. 여러 가지로 섞여 있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 시야가 넓어지고 삶을 넓게 표현하는 청춘이고 싶다"고 바랐다.
[스포츠투데이 현혜선 기자 ent@st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