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현혜선 기자] 사극의 대가 이준익 감독이 또 한편의 사극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흑백 사극이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수묵화 속에서 펼쳐지는 배우들의 세심한 연기는 그 어떤 색채보다 강렬하다.
영화 '자산어보'(감독 이준익·제작 씨네월드)는 흑산으로 유배된 후, 책보다 바다가 궁금해진 학자 정약전(설경구)과 바다를 벗어나 출셋길에 오르고 싶은 청년 어부 창대(변요한)가 '자산어보'를 집필하며 벗이 되어가는 이야기다.
작품은 흑산도로 유배 온 정약전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성리학이 기반이 된 조선에서 사학한 학문이라 일컫는 서학을 공부했기 때문. 먼 흑산도로 온 정약전은 진정 백성을 위한 학문이 무엇인지 깨닫고 어류도감인 '자산어보'를 집필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위해 흑산도에서 물질로 일가견이 있는 창대의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창대는 나라의 근간은 성리학에 있다고 여기며 서학을 멸시하는 인물이다. 서학 때문에 유배까지 온 정약전에 대한 시선이 좋을 리 없다.
창대는 양반인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나랏일을 하기 위해 홀로 성리학을 공부한다. 그러나 혼자 하는 공부에는 한계가 있다. 도저히 넘어가지 않은 책장에 결국 정약전에게 도움을 청하고, 정약정과 창대는 서로의 스승이 된다.
정약전은 끝이 없는 어류 공부에 매료되고, 창대는 성리학을 공부할수록 출세에 대한 욕망을 감추지 못한다. 결국 다른 곳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정약전과 창대는 각각 할 일을 위해 나선다.
이처럼 '자산어보'는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한 두 인물이 만나 서로의 스승이 되고 진정한 삶의 방향이 무엇인지 깨닫는 과정을 담는다. 정약전은 성리학을 깊이 공부한 후 서학에 빠졌고, 결국 성리학과 상관없는 어류학에 이르렀다. 이미 자신이 가고자 한 길을 명확하게 아는 인물이고, 그 신념 때문에 유배까지 올 정도로 단단하다. 정약전은 작품의 중심을 잡는 큰 줄기다. 흔들리지 않는 고목나무처럼 굳건하다.
창대는 정약전과 반대다. 자신이 믿었던 것들의 실상을 확인하고 매우 역동적으로 변화한다. 정약전을 밀어내고, 스승으로 삼으며 또 갈등을 겪고 극복하는 과정이 유려하게 그려진다. 이런 정약전과 창대의 모습은 서로의 캐릭터를 뚜렷하게 만든다. 비교를 통해 정약전과 창대의 신념과 상황 등이 견고해 보이는 것. 확실한 비교는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지름길이다. 정치적인 상황이 깃든 사극은 자칫 관객들에게 어렵게 다가갈 수 있다. 이준익 감독은 캐릭터의 장치를 통해 이를 쉽게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정약전과 창대가 중심을 잡고 변화하면서 극을 이끈다면, 가거댁(이정은) 복례(민도희) 등 주변 인물은 환상의 앙상블을 이루며 활력을 넣는다. 정약전이 집필한 '자산어보'는 조선시대 보기 드문 어류도감이다. 그만큼 생활에 밀접한 분위기다. 책의 분위기 대로 작품 역시 생동감 넘치는 이미지를 추구한다. 여기서 가거댁과 복례는 생활감과 생생함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이 땅에 살았던 실제 인물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 장을 마련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흑백의 화면을 통해 전달된다. '자산어보'는 이준익 감독이 '동주' 이후 새롭게 선보인 흑백영화다. 색채를 빼고 흑백만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의미다. 흑백의 화면을 통해서는 오히려 모든 게 선명하다. 색채로 분산될 수 있는 시선을 잡아 배우의 얼굴로 고정시킨다. 배우의 표정은 물론 눈썹의 움직임, 입술의 떨림도 세세하게 보인다. 오롯이 연기에 집중되니 몰입도도 덩달아 상승한다.
또 흑백으로 보이는 자연 풍경도 장관이다.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 산의 절경, 별이 쏟아지는 하늘 등은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하다. 그것도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수묵화다. 보기 힘든 절경을 동시에 즐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흑백의 연출, 연출, 메시지라는 3박자를 두루 갖춘 '자산어보'는 31일 개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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