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현혜선 기자] 사극의 대가인 이준익 감독이 또 다른 사극을 들고 나왔다.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고 다소 어려울 수 있는 사극에 임할 수 있었던 건 불안 때문이었다. 그가 말하는 불안은 오히려 긍정적이다. 도전과 성과를 부르는 불안에 중독됐다는 이준익 감독이다.
이준익 감독은 2003년 영화 '황산벌'을 시작으로 '왕의 남자' '라디오스타' '즐거운 인생' '님은 먼곳에'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평양성' '소원' '사도' '동주' '박열' '변산' 등 굵직한 작품을 연출했다.
그런 그가 '변산' 이후 약 3년 만에 영화 '자산어보'(감독 이준익·제작 씨네월드)로 돌아왔다. '자산어보'는 흑산으로 유배된 후, 책보다 바다가 궁금해진 학자 정약전(설경구)과 바다를 벗어나 출셋길에 오르고 싶은 청년 어부 창대(변요한)가 '자산어보'를 집필하며 벗이 되어가는 이야기다.
이준익 감독은 "처음부터 '자산어보'를 찍을 생각을 한 건 아니다. 서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동학 때문이다. 동학의 이름이 왜 동학일까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갖고 들어가 보니 서학이 있었다. 그렇다면 서학이 무엇일까. 천주교다. 우리나라 천주교는 가톨릭이 들어와서 전도한 게 아니라 책을 스스로 보고 자생적으로 발전한 경우다. 확인은 안 해봤지만 전 세계적으로 드문 경우가 아닐까"고 말했다.
이어 "천주교가 처음에는 종교보다는 학문이었다. 그래서 서학이지 않냐. 그런데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고 있는 정치 기득권 세력들은 이를 사악한 학문으로 여겼다. 이런 상황에 관심을 갖고 책을 보다 보니까 아주 인상적인 인물이 등장했는데 그게 황사영이었다. 황사영은 정약전의 조카사위다. 처음에는 황사영으로 작품을 만들어야지 싶어서 조사를 했는데 드라마가 너무 짧았다. 영화로 만들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더 찾아봤는데 정약용은 또 너무 긴 거다. 2시간 러닝타임으로는 안 되고 16부작은 해야 됐다. 그래서 정약전이 눈에 띄었다. 정약용의 형이고 같은 성리학의 뿌리에서 나왔는데 전혀 다른 자연과학 즉 해양생물을 다루지 않냐. 당시 성리학 기준으로 보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책을 쓴 거다. 이 사람이 이걸 왜 썼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흑산도에 유배 온 그런 유학자가 창대라는 인물의 도움을 받아서 '자산어보'를 썼다는 게 서문에 쓰여 있었다. 이걸 보니 또 창대가 궁금해졌다. 정약용, 정약전은 기록이 있는데, 창대는 이름만 있었다. 또 '자산어보'에 창대가 직접 언급한 내용이 기록돼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논문의 주석 같은 거였다. 창대와 정약전의 이야기 속에서 시대의 단면을 정확하게 치고 들어갈 수 있겠구나 싶었다. 사극은 죽고 죽이는 정치 이야긴데 그런 사건 위주보다는 사연 위주로 사극에 도전해보자는 마음이었다. 물론 비상업적인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자산어보'를 만들게 됐다"고 '자산어보'가 탄생한 배경을 밝혔다.
자산어보 이준익 감독 / 사진=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여타 성리학자들과 다소 다른 모습의 정약전이 이 감독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동생인 정약용과도 다른 모습이 더 흥미를 끈 포인트였다고. 이 감독은 "정약전은 기본적으로 명문 사대부인 정씨 집안의 성리학자였다. 정씨 집안들이 대체적으로 서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정약종은 사형을 당할 때 하늘을 보고 순교하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일종의 배교를 한 것"이라며 "그래도 정약용은 성리학자의 기본 틀에서 크게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목민심서'라는 책이 그걸 증명한다. 기본적으로 임금이 있고, 임금 품에 들어가서 좋은 관료가 돼 백성을 위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상이다. 정약전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둔 '목민심서'와는 다른 '자산어보'를 쓴다. 둘은 방향성과 방법론이 다르다. 정약전의 대사 중에 '뜻 모를 사람 공부보다 자명하고 명진한 사물 공부에 몰입하기로 했다'는 말이 있다. 정약전은 사물에 대한 가치를 파악하고 활용성을 밝히는 게 백성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라고 했다.
이런 마음으로 이 감독은 '자산어보'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고, 정약전과 창대는 각각 배우 설경구와 변요한을 만나 살아 움직였다. 기록이 세세한 정약전과 상상력을 발휘해 만든 창대의 밸런스를 맞추는 게 중요했다고. 이 감독은 "창대는 실존 인물이지만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인물은 허구 혹은 창작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왜 하필이면 창대를 이렇게 그렸냐면 정약전의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창대가 선명하게 보일수록 상대적 개념인 정약전도 선명해진다. 절대 비교는 부정확할 수 있지만, 상대 비교는 비교의 가치가 더 뚜렷하게 만든다. 정약전의 내면과 외면은 창대의 변화무쌍한 세계관 변화에 따라 발전하고 변화한다. 그 안에서 정약전의 판단과 선택과 관계성이 바뀌는 것"이라며 "둘의 관계 변화는 세상과 만나는 본질이고, 그 세상은 기득권이 장악하고 있는 세계다. 창대가 바뀌어야만 그 세계의 구석구석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런 목적으로 창대를 만들었고, 변요한이 워낙 연기를 잘해서 표현이 잘 됐다"고 흐뭇함을 표했다.
설경구와 변요한이 극의 중심을 잡고 작품을 끌고 가고, 주변 인물들이 작품의 생기를 불어놓었다. 이정은, 조우진, 민도희 등의 합이 앙상블을 이뤘다는 평이다. 이 감독은 "내가 내 입으로 만족감을 말하는 게 무색할 정도다. 시사회를 하고 나서 이들에 대한 좋은 얘기를 많이 들었다. 배우들의 성실함과 충실함, 선택을 한 배우들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감사할 따름"이라고 전했다.
특히 정약용 역에는 배우 류승룡이 특별출연해 작품을 빛냈다. 이 감독은 류승룡을 캐스팅하는 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설경구에게 정약용 역을 누가 하냐고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잘 모르는 배우가 나오면 존재감이 없을까 봐 걱정이었다. 그래도 정약용인데 존재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설경구가 류승룡이 '극한 직업'으로 천만 관객을 동원해 기분이 좋을 때라고 하더라. 그럴 때 제의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걸 해달라고 하는 게 미친 짓이지 싶었다. 그래도 설경구 말대로 메일로 시나리오를 보내고 매니저를 통해 보냈다는 문자를 보냈다. 조그만 역할인데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통화하자고 했다. 그런데 십분 후에 전화가 오더라. 시나리오도 안 읽고 하겠다는 전화였다. 내가 부담이 되니까 제발 읽으라고 했는데, 결국 류승룡은 읽지도 않고 하기로 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역시 류승룡은 류승룡이었다. 그가 등장하는 짧은 몇몇 순간은 공기가 바뀔 정도였다. 이 감독은 "류승룡은 목소리 자체가 이미 대학자다. 입을 여는 순간 그냥 훅 들어온다. 아주 미치겠다. 응당 다른 영화였으면 주연을 해야 되는데 여기는 잠깐 나오는 특별출연 아니냐. 결례지만 배우가 맡아줬고, 그 안에서 보인 연기는 정말 세련됐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딱 그만큼의 모습이었다. 이건 정말 선수들만 하는 연기의 거리 재기다. 딱 정약용의 몫만큼만 하는 거다. 절대 설경구의 연기 주파수를 넘지 않으면서 간격을 지킨다. 감독으로서 그런 걸 보면 막 끌어안고 뽀뽀를 하고 싶다"고 애정을 표했다.
자산어보 이준익 감독 / 사진=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사극은 고증과 역사적 자료 등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다. 또 혹자들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다룬 사극을 무겁게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감독이 '황산벌' 이후 꾸준히 사극을 찍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 감독은 "'황산벌'을 찍기 전에는 외화 수입업자였다. 외화를 수입하기 위해서는 외국에 가서 바이어들을 많이 만난다. 그런데 이 바이어들이 현대의 한국은 알면서도 한국 역사는 정말 모르더라. 중국, 일본과 비교해도 몰랐다. 일본 영화가 5~6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는데, 그때 휩쓸었던 영화들이 다 사극이다. 이걸 보면서 외국 사람들이 일본의 역사는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 역사는 모르고, 내가 설명하려고 하니 복잡했다. 그래서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준익 감독은 "보여주기 위해 한국 사극 영화를 찾아보려 했더니 별로 없었다. 아 내가 찍어야겠다 싶어서 찍은 게 '황산벌'이었고, 내친김에 한 번 더 찍자 해서 찍은 게 '왕의 남자'였다. 그러나가 '자산어보'까지 오게 됐다. 그다음에는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 이제는 나 말고도 사극을 잘 찍는 감독들이 많다. 앞으로도 훌륭한 사극 감독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며 "현대사회 100년 동안은 서양에 끌려다니다 보니까 수백 년, 수천 년 된 우리 선조들의 삶과 가치관에 대해 간구한 게 아닐까 싶다. 사극이라는 게 항상 영웅, 전쟁, 정치, 살인을 다루고 개인의 사소한 일상을 감춘 것 같다. 개인의 일상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세계관을 드러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그게 정약전"이라고 말했다.
이준익 감독이 꾸준히 작품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불안이었다. 이 감독은 "불안감이 영화를 찍는데 보약이 된다"는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그는 "불안하지 않은 인간은 없다. 지금 이 순간도 불안하다. 삶 자체가 불안 덩어리다. 불안하지 않다면 살아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직업 안에서 불안감을 외면하면 뜻을 이루지 못한다. 영화가 내 직업이니까 이 불안함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붙잡고 가는 거다. 불안도 중독이다. 오히려 불안이 없어지는 게 불안하다. 적당한 불안이 날 숨 쉬게 한다"고 속내를 밝혔다.
이어 "흑백영화는 도전이라면 도전이었다. '동주'로 성과가 있었기에 나름 자신감도 있었다. 그런데 조선시대를 흑백으로 찍는 건 또 새로운 불안요소였다. 그래도 내가 여러 편의 사극을 찍어서 노하우가 생긴 편이다. 요즘 사극 영화 제작비가 100억 원 정도 드는데, 그 반도 안 되는 돈으로 했다. 자연이라는 어마 무시한 무기를 활용했고, 연기 잘 하는 배우로 메꾼 거다. 내 불안을 자연과 배우로 메꿨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탄생한 '자산어보'가 코로나19로 힘든 상황 속에서 개봉된다. 이에 대해 이 감독은 "불안하다. 지금도 비대면으로 인터뷰를 한다. 기자간담회도 썰렁하다. 그렇지만 엄격한 방역수칙만이 살 길이기에 최선을 다해 맞추고 있다. 코로나19 호전이 더딘 상황에서 개봉하는 게 부담이 되지만 이미 이런 상태가 1년이 지났기 때문에 이 사회가 어느 정도 적응된 느낌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영화는 계속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정신으로 조심스럽게 개봉을 준비하게 됐다"고 말했다.
끝으로 이준익 감독은 '자산어보'가 2021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지점을 계산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관객들을 획일화 시킬 순 없다. 개인 차라는 것도 있고, 세대 차도 있다. 성별의 차이와 입장의 차이도 있다. 그것을 우리는 한 데 묶어서 대중이라고 부른다.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전에 과도하게 이런 걸 의도적으로 계산했는데, 결국 잘 안되더라. 의도는 들키기 마련이고, 의도 없음이 의도 있음보다 더 가치가 있다. 아무리 좋은 가치의 의도라도 없으니만 못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 영화가 어떤 의미로 사람들에게 자리매김할지는 관객이 부여하는 거다. 때문에 어떻게 다가갈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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