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는 연중기획으로 '한국 체육, 새로운 100년을 위해'를 격주로 연재한다. '한국 체육, 새로운 100년을 위해'는 지난 100년간 화려한 성공 속에 가려진 한국 체육의 어두운 현실을 살펴보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한국 체육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예정이다.《편집자주》
[스포츠투데이 이상필 기자] 대한민국 프로스포츠가 학교폭력(학폭) 논란으로 홍역을 앓고 있다. 여자프로배구 흥국생명 이재영, 이다영 자매에 대한 폭로로 시작된 학폭 논란은 어느새 프로야구와 프로농구, 프로축구로까지 번졌고, 이제는 프로스포츠 전체를 넘어 전사회적인 문제로 커지는 모습이다.
시작은 지난달 초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현직 배구선수 학폭 피해자들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글쓴이는 학창시절 배구부에서 현직 배구선수들로부터 가혹행위와 폭언 등에 시달렸다고 폭로했다. 글에 적힌 가혹행위와 폭언의 수위는 충격적이었고, 가해자의 신상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글 속 정황은 여자프로배구 최고 스타인 이재영, 이다영 자매를 지목하고 있었다.
결국 이재영과 이다영은 자필 사과문을 통해 학교폭력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용서를 비는 것만으로는 과거의 잘못을 모두 지울 수 없었다. 소속팀 흥국생명은 두 선수에게 무기한 출전정지 징계를 내렸고, 대한민국배구협회는 두 선수를 국가대표로 선발하지 않기로 했다.
소속팀에서 우승, 국가대표팀에서 올림픽 출전을 바라보고 있었던 두 선수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게 됐다. 제아무리 최고의 스타라도 과거의 과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 프로스포츠 전방위로 확산된 학폭 미투
이재영, 이다영 자매의 몰락은 프로스포츠계 학폭 미투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됐다. 종목을 불문하고 프로스포츠 선수들에 대한 학폭 미투가 쏟아졌다.
가장 큰 직격타를 맞은 종목은 프로배구였다. OK금융그룹 송명근, 심경섭은 학교폭력 의혹이 제기되자 사실을 인정하고 자진해서 남은 시즌 경기에 출전하지 않기로 했다. 삼성화재 박상하는 학폭 미투 폭로의 일부 내용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학폭 사실 자체는 인정하고 코트를 떠나기로 했다. 지도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과거 국가대표팀 코치 시절 박철우(한국전력)에게 폭력을 가했던 KB손해보험 이상열 감독은 다시 논란이 불거지자 남은 시즌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프로야구에서는 한화 이글스 소속 A선수와 LG 트윈스 소속 B선수, 두산 베어스 소속 C선수가 학폭 의혹에 휘말렸다. 다만 이 선수들은 학폭 미투 내용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다. 또한 A선수와 B선수는 법률대리인을 선임해 폭로자에 대한 법적 대응에 나서기로 했다. 프로농구에서는 현역 최고선수로 꼽히는 D선수가 중학교 시절 학폭 가해 논란에 휘말렸고, D선수는 얼차려를 준 것은 인정했지만 직접적인 폭력은 가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프로축구에서도 충격적인 학폭 미투가 나왔다. 전 국가대표팀 주장 기성용을 겨냥한 폭로였다. 폭로자들은 지난 2000년 1월부터 6월까지 전남 모 초등학교 축구부에서 1년 선배인 기성용에게 구강성교 등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기성용은 기자회견을 자청하며 혐의에 대해 강하게 부인했고, 지금까지도 양측의 진실공방이 거듭되고 있다.
폭로글에 자신의 선수 기록조회를 첨부한 모습 / 사진=네이트 판 캡처
▲ '내부에서는 해결 안 된다'…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피해자들
그동안 체육계 내부의 부조리, 폭력 등을 고발하는 사건은 많았다. 하지만 이번 프로스포츠 학폭 미투의 특징은 피해자들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외부로 직접 피해 사실을 알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체육계 내부에서의 고발로는 사건을 해결하기 힘들다는 피해자들의 절망과 절박감이 반영된 결과다. 그동안 체육계에서는 '체육계의 일은 체육계 내부에서 해결하자'는 풍조가 컸다. 체육계만의 특성과 관행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체육계만의 특성과 관행을 고려하더라도, 체육계의 기준은 우리 사회의 기준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다. 체육계 특유의 폐쇄적 문화로 인해 우리 사회에서는 절대 용납될 수 있는 일이 가볍게 여겨지거나, 처벌을 하더라도 솜방망이 처벌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진작에 해결됐어야 할 일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방치되면서, 결국 체육계 내부에서 곪아터지는 부작용으로 이어졌다.
현재 학폭 미투 피해자들은 한때 자신이 체육계 내부의 사람이었던 만큼 이러한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체육계 바깥에 도움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신상이 드러날 우려도 있지만, 폭로자들은 자신의 주장에 신빙성을 더하기 위한 방법으로 스스로 자신의 신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피해자들의 절박함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 '엉뚱한 답변' 대한체육회, '했던 말 반복' 이기흥 회장
하지만 이러한 현실 속에서 가장 큰 책임을 가진 대한체육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안이한 대응으로 논란을 자초하기도 했다.
대한체육회는 지난달 17일 전용기 의원실에 제출한 답변서에서 "청소년 학폭 및 가혹 행위는 근절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청소년기에 무심코 저지른 행동에 대해 평생 체육계 진심을 막는 것은 가혹한 부분도 일부 있을 수 있다"며 "형사 처벌을 받은 범죄자에 대해서도 사회 진출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답해 물의를 빚었다.
뒤늦게 "학교 폭력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징벌 및 규제를 우선으로 실시하되, 청소년인 점을 감안해 올바른 자세로 사회를 살아갈 수 있도록 병행하는 프로그램 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이미 대한체육회를 향한 국민들의 시선은 싸늘해진 뒤였다.
최근 대한체육회장 재선에 성공한 이기흥 회장은 취임사에서 "최근 인권을 침해하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해 체육인 모두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면서 "메달과 성과는 폭력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체육인들은 실력과 재능을 쌓기에 앞서 인성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틀리지 않는 말이지만, 이기흥 회장은 지난 임기 중 체육계 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었다. 수년째 반복되는 체육계 폭력 사건 속에서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대해 이기흥 회장의 엄중한 책임감이 수반되어야 한다.
한국 체육의 새로운 100년이 시작되는 해로 기대를 모았던 2021년은 시작부터 우울한 분위기다. 체육계에 대한 국민들의 인내심도 이제는 한계를 향하고 있다. 언제까지 국민들이 체육계를 바라보며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는 것일까.
[스포츠투데이 이상필 기자 sports@st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