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현혜선 기자] 아줌마부터 변호사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배우가 있다. 캐릭터가 옷이라면, 새로운 스타일을 주저하지 않고 싶다는 설명이다. 새로운 캐릭터도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하는 염혜란은 이 구역의 진정한 패셔니스타다.
2000년 연극 '최선생'으로 데뷔한 염혜란은 드라마 '도깨비' '슬기로운 감빵생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라이브' '무법 변호사' '라이프' 등에 출연하며 신스틸러로 활약했다. 그러던 중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통해 이름을 알렸고, '경이로운 소문'을 통해 인기를 끌었다.
그런 그가 '빛과 철'(감독 배종대·제작 원테이크필름)로 스크린에 돌아왔다. '빛과 철'은 한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두 여자가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염혜란은 극 중 2년째 의식불명에 빠진 남편을 간병하는 영남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염혜란은 '빛과 철'의 시나리오에 끌려서 출연을 결정하게 됐다고 전했다. 그는 "시나리오가 너무 탄탄하고 많은 고민 끝에 나왔다는 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강렬했고, 도대체 어떻게 되는지 따라갔다. 그러니 고구마 줄기처럼 뭉텅뭉텅 이야기가 나오더라"며 "사실 독립영화의 주인공을 해보고 싶었다. 다른 것보다 메시지가 강하고 배우들이 해야 되는 것도 감정적으로 어렵지만 매력적이었다. 캐릭터도 여성 둘이 극한까지 가는 것에도 끌리더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감독님과 만났는데 많은 고민을 했던 흔적이 보였다. 고민을 많이 한 것에 믿음이 간 거다. 이 어려운 이야기를 왜 하는지 감독님께 여쭤본 적이 있다. 감독님 본인도 죄책감을 갖고 산 적이 있는데, 그 사람들의 힘든 과정이 끝나고 누구의 잘못도 아닌 죄책감이 덜어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이 메시지가 좋았다"고 설명했다.
'빛과 철'의 출연 계기를 두고 독립영화의 주인공을 해보고 싶었다던 염혜란. 실제로 주인공을 맡아보니 어땠을까. 그는 "독립영화를 하고 싶은 게 얼마나 피상적이었고 두루뭉술했는지 알게 되더라. 함께 만드는 느낌을 갖고 싶었다. 이런 메시지를 갖고 있는 작품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이냐. 우리의 작품인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싶어서 주인공을 하고 싶었다. 한 인물이 어떨 때는 중간에 끝날 수 있는데 주인공은 끝까지 가지 않냐. 그런 게 해보고 싶었다. 한 작품에서 긴 호흡을 가져가는 건 어려운 거구나. 책임감도 많이 느껴진다. 특히 찍고 나서"라고 말했다.
이렇게 영남과 만난 염혜란은 영남을 두고 "사는 게 힘들어도 버티는 인물"이라고 표했다. 영남을 둘러싼 고통이 마치 태풍과 같고, 태풍의 한 가운데서 일상을 버티는 인물인 것. 태풍의 눈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엄청난 바람을 느낄 수 있는 삶이지만 그 안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이 강한 인물이다.
염혜란은 이런 인물을 프레임에 갖춰지지 않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고. 그는 "이 영화는 미스터리 형식으로 진행되고 엄청난 감정들이 부딪힌다. 영남이 장르의 한 축을 담당하거나 프레임에 갇혀서 스테레오처럼 움직이지 않길 바랐다. 살아 있는 연기가 됐으면 싶었다. 오래 간병한 사람을 봤는데, 그들도 항상 슬프지 않고 연대하며 웃으면서 삶을 산다. 그런 강인한 여성 말이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작품에서 많이 보여주지 못한 것 같다"며 "말투도 신경 썼다. 대사 같지 않고 말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고 전했다.
고민 끝에 염혜란은 영남의 삶 깊숙이 들어갔다. 영남의 삶 속에서 염혜란은 배운 점을 찾았다. 그는 "타인과의 소통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본 작품이다. 내가 타인을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게 얼마나 좁은 식견인가. 내 식대로 생각하는 게 얼마나 편한가. 내 식대로 생각해서 소통이 안 되고 깨질 수 있다"며 "내가 다른 모습을 봤고 다른 식으로 느꼈다고 생각하면 누군가에게 폭력적으로 다가왔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이런 걸 되돌아보게 되더라. 감독님이랑 이 어둡고 힘든 이야기를 어떤 의미로 전달해야 될까 얘기를 많이 했다. 이 사람들이 한 발 앞으로 나갔으면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죄책감을 갖고, 내가 모르게 상처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죄책감을 덜어내고 남아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 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남도 힘들고 희주도 힘들다. 죄책감 때문인데, 이 사람들이 다른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사건의 진실에 대해 파헤치는데 결국은 사건보다 마음을 보는 영화가 됐으면 한다. 결국 공장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냐. 이 사건은 사실 공장에서 내팽개치지 않았으면 생기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소통 문제도 사회적 구조 속에서 왜곡될 수 있다. 개인이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말고 덜어내는 게 메시지"라고 설명했다.
2월 극장가는 염혜란으로 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영화 '빛과 철', '아이', '새해전야'를 통해 스크린을 장악했다. 이에 대해 염혜란은 "코로나19 때문에 일이 연기되고 일을 쉬고 있는 배우들이 많다. 내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으니까 이건 큰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시기적으로 이렇게 겹칠 줄은 몰랐다.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어떤 계획도 세우지 못하게 만들어서 변경된 거다. '새해전야'는 원래 새해 전에 개봉하려고 했는데 미뤄진 거고, '아이'는 시기가 당겨진 거다. '빛과 철'은 원래 2월에 개봉하려고 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새해전야'나 '아이'는 내 분량이 많지 않다. 한꺼번에 나와서 질리거나 싫은 느낌은 안 드셨으면 좋겠다"고 미소를 보였다.
열일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염혜란은 "정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내 일을 했을 뿐인데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이건 배우의 특권 같다. 배우를 선택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에는 여자 역할이 좀 기능적일 수 있고, 스테레오 타입이었는데 요즘은 좋은 여성 캐릭터들이 많이 나온다. 그런 작품이 올 때 거절하고 싶지 않다. 좋은 작품이 많아지는 것도 시대를 잘 만나서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생겼는데 여러 캐릭터에 받아주셔서 감사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염혜란의 전성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그는 새로운 캐릭터에 대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특히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캐릭터를 주로 맡으며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이에 대해 염혜란은 "그런 분들을 돌아보는 게 작품이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외로운 영혼을 보는 게 작품의 의미고, 배우는 그런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내 주변에 아줌마가 많은데 참 아줌마들이 외롭다는 게 느껴진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될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일은 건강하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존감이 떨어져 있는 모습을 보인다. 반드시 해야 되지만 소중함을 모르고 폄하되기도 한다. 그래서 아줌마 역할에 애정이 많이 생긴다"고 표했다.
그러면서 "다양한 캐릭터는 새로운 옷이라고 생각한다. 늘 나에게 어울리고 편한 옷만 입다가 새로운 옷을 입는 거다. 남의 눈치를 보고 안 입고 있었는데 막상 입으니 잘 어울리는 거다. 내가 가진 벽이 심했구나. 이런 건 크게 중요하지 않은데. 이제는 또 다른 옷이 궁금해졌다. 다른 옷도 과감하게 입어볼 용기가 생겼다"고 말했다.
끝으로 염혜란은 "소소한 얘기를 좋아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 같은. 그렇지만 그 영화들이 마냥 잔잔하지만은 않다. 그 안에 어마어마한 것들이 들어 있다. 세밀하고 작고 소중한 걸 좋아한다. 그런 작품들을 계속하고 싶다. 특별히 도전하고 싶은 장르가 있다기보다는 작지만 의미 있는 것들을 해보고 싶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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