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우다빈 기자] 배우 한지민이 영화 ‘조제’로 돌아왔다. 영화 ‘미쓰백’, 드라마 ‘눈이 부시게’, ‘봄밤’ 등 주로 현실적인 30대 여성을 그려왔던 한지민. 이번 작품에서는 몽환적이고 모호함으로 가득한 인물 조제를 선보인다. 소통을 단절한 인물의 눈빛을 위해 덜고 또 덜어냈다. 그렇게 한지민은 공허함 그 자체가 돼 관객들을 만날 준비가 됐다.
‘조제’(감독 김종관·제작 볼미디어)는 처음 만난 그날부터 잊을 수 없는 이름 조제(한지민)와 영석(남주혁)이 함께한 가장 빛나는 순간을 그린 영화다. 극중 한지민은 자신만의 세계에 사는 조제 역을 맡아 매 순간 변하는 캐릭터의 내면을 섬세한 눈빛과 표정으로 완성해냈다. 특히 연기 톤에 높낮이를 둬 변화하는 인물의 과정을 농밀하게 담아낸다.
먼저 한지민은 영화를 본 소감으로 “처음 완성본 속 소리, 음악 없이 날것의 내 연기를 보니 발가벗은 느낌이었다. 조제가 잔잔한 톤과 감정의 폭을 많이 드러내지 않아 연기하는 동안 감정을 덜어내는 눈빛을 해야 했다. 그 지점에서 순간 ‘내가 표현을 더 했었어야 하는 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편집이 다 채워진 상태로 보니 제가 처음 의도했던 대로 연기를 했다면 조제 자체가 공간과 정서가 주는 느낌에서 조금은 동떨어져 보일 수 있었겠더라”고 말했다.
조제 한지민 남주혁 / 사진=영화 조제 스틸컷
평소 김종관 감독과 사석에서 많은 대화를 나눈다는 한지민은 감독의 색채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김종관 감독의 작품에 내가 들어가면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고. 한지민은 ‘조제’ 시나리오를 받던 당시를 떠올리며 “김종관 감독이 시나리오를 건넸는데 감정 지문이 많지 않았다. 친절한 설명이 없었지만 배우로서 채워나갈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마치 숙제처럼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조제가 진짜 갖고 있는 생각이 무엇일까, 영석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궁금증이 있을 수 있다. 관객 입장에서 당황스럽지 않게 표현의 지점을 찾아가야 했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동안 ‘보여 주세요’라는 디렉션을 많이 받았다면 이 작품에서는 조금 덜 해야 하는 작업이 많았다. 그 작업이 제게는 생소하고 어려웠지만 흥미롭게 다가왔다”고 회상했다.
국내 김종관 감독의 연출로 새롭게 리메이크된 ‘조제’는 ‘원작 소설, 일본 영화 ‘조제’보다 더 어둡고 잔잔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전체적인 분위기 뿐만 아니라 조제와 영석의 관계성에 더 집중하며 또 다른 매력을 선보인다. 한지민은 두 작품 모두 봤다며 “일본 영화 ‘조제’를 먼저 봤다. 영화가 워낙 좋다 보니 소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사실 보게 되면 원작이 강하게 들어올 것 같아 시사회 전이 돼서야 찾아봤다. 원작은 겨울이 되면 생각날 정도로 좋았다. 조제라는 캐릭터의 매력도 높았고 거침없이 표현하는 사랑의 이야기가 매력적이었다. 리메이크의 부담감이 없진 않았지만 차별점을 고민하기보다 김종관 감독의 시나리오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한다는 마음으로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원작과의 차별점은 무엇이 있을까. 이에 한지민은 “조제가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원작 조제가 사랑에 포커스를 맞췄다면 우리 작품 속 조제는 책을 통해 더 많이 확장된 인물이다. 또 사랑 앞에서 조금 더 적극적이지만 그 사랑을 낯설어하고 불안해하는 부분이 있다”고 본인이 느낀 바를 밝혔다.
처음 시나리오 속 조제는 유난히 한지민에게 아리게 다가왔다. 아직까지 혼자 있는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는 한지민이기에 극 중 조제의 고독과 쓸쓸함은 여러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영석이 떠나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텅 빈 집에서 하루 하루를 흘려 보내는 조제의 나날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조제에게 부러운 점도 있었다고. 한지민은 “조제의 붙잡을 수 있는 용기가 부러웠다. 저도 사랑인지 아닐지 헷갈릴 때가 있다. 명확히 이 사람과 인연을 이어갈지 고민이 있었다. 조제 또한 영석을 만나며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겠다. 사랑 앞에서 많이 주저하고 겁냈기 때문에 나와 닮아있는 부분이 있었다. 조제가 영석을 담담하게 이별인사를 할 때 부러웠다. ‘사실 나는 너가 옆에 없어도 이제 괜찮다’는 대사가 생각난다. 내가 겪는 이별의 모습은 다르다. 얼마 전 할머니를 떠나보내야 했다. 그 이별 앞에서 받아들이기까지 시간들을 잘 견뎌내는 것이 어려웠다. 지금까지도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 보고 싶음, 빈 자리가 힘들었다. 조제는 담담하게 이별을 건네고 헤어질 시기라는 것을 느끼고 말을 했다는 게 부러웠다. 이별 앞에서 배워가는 지점이 있었다”며 덤덤하고 또 솔직하게 답했다.
한지민의 말을 빌리자면 ‘조제’는 그에게 연기적으로 새로운 고민이 부딪히는 작업 그 이상이었다. 그간 거쳐온 수많은 연기 작업과 달리 ‘조제’는 조금 더 덜어내고 비우는 과정을 가졌다. 특히 자신이 하고 싶은 언어를 문어체로 말하거나 잘 드러내지 않는 조제라는 인물이기에 표현은 까다로울 수밖에. 모호한 색채로 가득한 인물을 만난 한지민은 현장에서 불안함을 겪고 또 겪었다. 그럴 때마다 의지가 된 것은 감독과의 긴 이야기와 인물을 표현하려는 시도였다.
조제 한지민 남주혁 / 사진=영화 조제 스틸컷
겉으로 보이는 조제 만의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한지민은 김종관 감독과 여러 시도를 해봤다. 실제 어딘가 살 법한 가공되지 않은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분장과 같은 인위적인 것은 모두 걷어냈다. 아무것도 만지지 않은 머리와 거친 피부를 표현하며 시각적으로 쓸쓸함을 자아내려 했고 이는 영화 속 하나의 결로 완성됐다.
영화가 미리 공개된 후 ‘미쓰백’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를 두고 한지민은 “처음 ‘조제’를 선택했을 때 ‘미쓰백’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시나리오를 선택할 때 ‘미쓰백’이 생각났다면 주저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단순하게 원작 캐릭터가 매력적이었고 감독님과 설레는 작업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조제를 들여다보고 준비하다 보니 ‘미쓰백’이 떠올랐다. ‘미쓰백’은 자신이 세상을 단절시킨 인물이다. 다르게 연기하겠다고 결심하진 않았지만 닫힌 세상 안, 단절되고 소통하지 않고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것 같다. 연기 톤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미쓰백’이 떠올라 감독님에게 먼저 얘기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한지민은 2003년 드라마 ‘올인’으로 연기에 입문, 어느덧 데뷔 18년차 연기자가 됐다. ‘올인’에서 연기를 시작했지만 당시 배우의 마음가짐 보다는 본인의 능력 부족에 대한 자책이 주를 이뤘다고. ‘올인’이라는 작품으로 처음 연기할 기회를 얻었지만 연기에 대한 열정과 책임감이 크지 않아 매일 눈물을 흘렸다는 한지민이다. 결국 연기를 그만두려 했을 때 영화 현장을 만났고 연기에 대한 용기를 갖게 됐다. 당시를 두고 한지민은 “‘청연'이라는 작품으로 감독님과 소통했고 그 안에서 내가 느끼지 못했던 캐릭터 감정을 표현하는 희열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나중에 이 순간이 횟수가 늘지 않을까, 연기를 계속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다”며 확신을 갖게 된 분기점을 회상했다.
다만 한지민에게도 슬럼프는 자주 찾아왔다. 그를 괴롭게 만든 것은 바로 같은 연기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비슷한 장르에서 비슷한 캐릭터를 만나 비슷한 연기를 하고 있는 본인을 본 한지민은 좌절과 자괴감을 느꼈다. 그렇게 한지민은 그를 붙잡았던 영화 현장으로 다시 발을 옮겼다. 역할의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고 새롭게 할 수 있는 역할이라면 무엇이든 도전했다. 그리고 이 과정은 한지민에게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관찰하거나 다른 장르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기회로 남았다. 한지민은 기회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만드는 배우다. 결핍을 해소하고 낯선 작업을 제련해 결국 스스로의 것으로 만든다. 한지민에게 이번 작품은 ‘덜 채우기’의 반복이자 성장통이었다. 성장통이란 결국은 사라지고 성장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한지민은 여전히 수 없이 계단을 오르는 성장통을 겪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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