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현혜선 기자] 매 작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우가 있다. 큰 역할이든 작은 역할이든 자신의 존재감을 제대로 각인시킨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부분도 연기적으로 고민이란다. 가장 어렵다는 평범함 속에 빠지고 싶다는 배우 이정은이다.
이정은은 1991년 연극 '한여름밤의 꿈'으로 데뷔해 영화 '택시운전사' '어른도감 '미쓰백' '여보세요' '기생충' 드라마 '역도요정 김복주' '내일 그대와' '쌈, 마이웨이' '미스터 션샤인' '눈이 부시게' '타인은 지옥이다' '동백꽃 필 무렵' '한 번 다녀왔습니다'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이런 이정은이 이번에는 '내가 죽던 날'(감독 박지완·제작 오스카 10 스튜디오)로 관객을 만났다. '내가 죽던 날'은 유서 한 장만 남긴 채 절벽 끝으로 사라진 소녀와 삶의 벼랑 끝에서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내민 무언의 목격자까지 살아남기 위한 각자의 선택을 그린다. 이정은은 극 중 무언의 목격자 순천댁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이정은은 '내가 죽던 날'을 정리했다. 그는 "사실은 그때도 느꼈던 거지만 사람이 자기 감정을 잘 추스르고 결정할 수 있을 때 돈독해지는 것 같다. 감정이 꼬리가 안 잡힐 수도 있다. 일은 내가 잡고 살 수 있는데, 감정은 정리가 안 된다. 그래서 내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 때가 위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기분을 공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작품에 임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 공감이 되는 부분도 있고, 아마 따라오지 못하는 부분도 있을 거다. 못 따라온다고 하더라도 삶에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못 따라오는 것도 심각하게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며 "또 한국에서 호흡이 느린 영화에 대해 자신 없는 사람에게 용기를 줬으면 좋겠다. 내가 출연했던 전작들과 다르게 느린 영화는 파고가 높지 않아서 수면 아래 있는 감정을 느끼는데 시간과 공이 들어간다. 그런 결을 따라가는 작품도 나와야 되지 않을까. 지금 많이 바뀔 것 같은 세상에서 멈춘 느낌이다. 그런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졌고, 그런 건 개인의 감정이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설명했다.
'내가 죽던 날'은 절벽 끝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정은은 살면서 절벽 끝에 서 있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을까. 그는 "연애가 깨졌을 때가 아닐까. 연애가 깨지는 건 지구를 들어 올리는 것만큼의 고통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을 좋아한다. 또 힘들었던 시기는 아팠을 때다. 공연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배우로서 생명이 끝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위기였다. 다시 무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다행히 치료를 하면서 돌아갈 수 있었다"며 "절망에 빠졌을 때 지름길은 없다. 괴롭다가 주변에서 손을 내밀어 주면 되는 것"이라고 전했다.
감정의 파고가 높지 않아서 따라가기 어려운 영화 '내가 죽던 날'. 이정은은 공생에 대한 메시지가 마음에 다가와 작품을 선택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이 시나리오가 우리 옆 사무실에서 만들어지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잘 살고 있었던 사람이 뒤통수를 맞고 '내가 뭐지?'라는 생각이 들 때, 사람이 어떻게 존재할까 고민하는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거다. 이런 부분이 마음에 와 닿았다"고 전했다.
내면의 상처와 폭넓은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만큼 심적으로 힘든 점도 있을 터. 이정은은 "내가 맡은 순천댁은 이상적인 인물이다. 자신의 불행을 딛고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역이다. 그런 역들이 내게 오는 것이 과연 내가 그런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만들더다. 내가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싶었다. 이런 고민이 조금 힘들었다. 그리고 경청하는 것을 유지할 수 있어서 이상적인 역할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캐릭터를 통해 배운 점도 있다고. 이정은은 "어쨌든 순천댁은 자기가 불행해야 되는 순간에 가진 생각을 암담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누군가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것으로 삶을 옮겨갈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럼 마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많이 배운 것 같다"고 설명했다.
연기적으로도 성숙할 수 있는 기회였다. 순천댁은 말을 하지 못해 대사가 없는 역할이다. 오직 눈빛과 행동으로만 그 깊은 감정을 전달해야 했다. 이정은은 "나한테도 묘한 도전이었다. 내가 맡았던 역할 중에 주로 대중들이 사랑해 준 건 언어의 유희가 있는 역이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말을 하는 것이 부담이 될 때가 있다. 그런 시기에 순천댁을 만났다. 내가 배우로 연기를 기갈나게 잘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시도하고 시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게 스스로 만족된다. 말이 없는 사람을 할 때조차 액션과 리액션이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 되도록 힘을 빼고 일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연기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기생충' 때는 어떤 포인트에 있는 자유로움이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는 일상으로 내려오려고 노력했다. 표정도 드러나지 않게. 하지만 내가 그간 맡았던 역할이 있기에 관객들이 기대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진짜 뭐가 없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내가 죽던 날'은 여성 배우, 여성 스태프 위주로 꾸려진 작품이다. 현장 분위기도 남달랐을 테다. 이정은은 "현장이 조용하고 집중도가 높았다. 나중에 보니까 여자분들이 많이 있더라. 생각을 못 하고 찍었다"며 "여자 스태프라고 인식되는 게 아니라 그냥 스태프다. 김혜수도 여배우의 스타지만 그냥 배우다. 인식을 하지 않고 동료로 대한 거다. 여성 위주로 꾸려졌을 때 좋은 점은 음식이 풍요로운 거다. 여자들이 진짜 밥을 많이 먹는다. 밥도 잘 먹고 풍요로운 현장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정은은 영화 '기생충' 이후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한 번 다녀왔습니다' 등 인기작에 줄줄이 출연하면서 존재감을 입증했다. 참 연기를 잘하는 배우다. 이에 대해 이정은은 "좀 으쓱했다. 그런데 '한 번 다녀왔습니다'를 하면서 무너졌다. 시청자 반응 중에 '평범한 연기를 언제 하려고 저러냐. 독특해 보이려고만 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때 매니저를 붙잡고 일주일을 고민했다. 내가 연기를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부분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지금도 고민하고 있다. 평범함은 눈에 드러나지 않지만, 내면을 유지하는 역할이다. 이건 정말 연기를 잘 하는 선배들이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연기를 잘 한다고 으쓱할 때 이런 걸 봐서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계속 고민할 것"이라고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작품은 좋은 어른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이정은이 생각하는 좋은 어른은 어떤 어른일까. 그는 "어른이 되면 자꾸 말을 많이 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하지 않고 기다려 주는 게 좋은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타이밍이 생기면 좋은 방향으로 제시할 수 있는 어른이다. 좋은 배우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배우가 좋은 배우다. 만들어 낸 게 아닌, 들여오는 대로 반응하는 사람 말이다"라고 밝혔다.
끝으로 이정은은 좋은 어른이자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그는 "대학을 다닐 때 연기는 나를 보여주는 거라는 걸 배웠다. 충격적이었다. 당시 난 연기를 소리로 한다고 생각했다"며 "선배들에게도 많이 배운다. 또 함께 작품을 하는 배우를 통해서도 계속 배우고 있다. 이분들이 여기까지 올라온 이유가 연기를 하면서 다 보여지더라. 그런 지점에서 자극이 된다"고 했다.
이처럼 이정은은 눈에 띄는 역할부터, 그곳에서 오는 연기적 고민까지 솔직히 털어놨다. 참 연기 잘하는 배우 이정은의 겸손한 모습이다.
[스포츠투데이 현혜선 기자 ent@st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