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현혜선 기자]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상처를 받는다. 상처의 깊은 곳까지 내가 들어온 순간, 절벽 끝에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 나의 아픔에 공감해 줄 사람만 있으면 치유받을 수 있다. 절벽 끝에서 손을 내밀어 줄 영화 '내가 죽던 날'이다.
'내가 죽던 날'(감독 박지완·제작 오스카 10 스튜디오)은 유서 한 장만 남긴 채 절벽 끝으로 사라진 소녀와 삶의 벼랑 끝에서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내민 무언의 목격자까지 살아남기 위한 각자의 선택을 그린다.
작품은 오랜 공백 후 복직을 앞둔 형사 현수(김혜수)가 외딴섬 절벽 끝에서 유서 한 장만 남긴 채 사리진 소녀 세진(노정의)의 사건을 자살로 종결짓기 위해 떠나면서 시작된다. 여태까지 자신의 삶이 완벽하다고 믿었던 현수는 남편의 불륜과 진흙탕 싸움이 된 이혼 소송, 그리고 교통사고 등으로 지쳐 있는 상태다. 나아가 자신의 존재마저 부정할 정도로 상처 속에 파묻힌 인물이다. 그런 현수는 자신의 존재를 찾기 위해 일이라도 할 수 있길 강력히 희망한다. 그러나 복직에는 징계가 따르는 상황이다. 이에 현수는 쉬운 복직을 위해 세진의 실종을 자살로 종결지으라는 명령에 따라 섬으로 향한다.
유서, 증언, 상황 등 모든 점이 세진의 실종을 자살로 이끈다. 그러나 현수는 세진을 둘러싼 인물들과 마주할 때마다 세진의 아픔을 들여다보게 되고, 자신의 아픔과 맞물려 깊은 공감을 하게 된다. 또 말을 못 하는 마지막 목격자 순천댁(이정은)에게서는 묘한 느낌을 받는다. 현수는 사건의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마주할 때마다 아파하고, 그 아픔을 터트리면서 자신의 상처도 치유를 받게 된다.
이처럼 작품은 서로가 서로의 치유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현수, 순천댁, 세진은 각자 상처를 지닌 인물이다. 현수는 이혼의 상처, 순천댁은 아픈 조카에 대한 상처, 세진은 가족의 잘못으로 인한 상처로 각각 절벽 끝에 서 있다. 절벽 끝에선 이들이 붙잡을 수 있는 건 결국 서로의 손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절벽은 상징적인 공간이다. 세진이 몸을 던진 곳이기도 하고,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들의 구원 역시 절벽 끝에서 이루어진다.
어떻게 상처가 치유 자체가 될 수 있을까. 상처를 입은 인물은 다른 사람의 상처에 더 깊은 공감을 하게 된다. 겪어 본 고통이 아닐지라도 무심코 지나갈 수 있는 작은 상처까지 돌볼 수 있는 것이다. 세진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세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저 잘 지내겠지 넘겨짚을 뿐이다. 오직 순천댁과 현수만이 그의 상처에 귀를 기울였다.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 공감하고, 공감이 주는 공생이 위로를 준 요인이 된 것이다. 공감과 공생이야말로 현대 사회에 필요한 감성이다.
작품의 큰 줄기는 세진의 사건이다. 이를 형사라는 현수의 눈을 통해 보여준다. 현수의 눈에 비친 세진은 어른들에게 상처받은 소녀다. 여기서 작품의 또 다른 메시지가 나온다. 참된 어른, 그리고 진정한 어른에 대한 이야기다. 어른이 아이를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먼저 사회에 나간 어른들이 아직 미성숙한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도리인 것이다. 그런데 세진 주변의 사람들은 그를 돌보지 않는다. 부모, 형제, 세진을 돌보던 경찰, 마을 사라들, 도서관 사서까지 수많은 어른들이 세진의 주변에 있었다. 이들은 어른의 도리를 다하지 않은 것이다. 참된 어른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중심에는 김혜수가 있다. 김혜수는 역시 김혜수였다. 깊고 진한 감정선, 상처 입은 영혼 등을 특유의 표정과 호흡으로 생생하게 전달한다. 단단하게 극의 중심을 잡으면서 이끌어 간다. '시그널'의 형사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좀 더 인간적이고, 더 감성적이다. 날카로운 형사의 모습 아래 진한 휴머니즘이 내포돼 있다. 연기 내공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말이 없는 역할을 맡은 이정은의 연기도 돋보인다. 그는 말없이 오직 호흡과 표정 만으로 감정을 전달해 스크린을 압도한다. 상대방과의 호흡도 마찬가지다. 연기란 대사를 주고받지 않아도 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내가 죽던 날'은 인간의 성장과 치유, 그리고 참어른에 대해 메시지를 던진다. 극은 전체적으로 잔잔하게 흘러간다. 우리 인생이 큰 굴곡이 있지만 잔잔하게 흐르는 것처럼. 한국 영화에서는 오랜만에 잔잔하고 묵직한 영화가 등장했다. 코로나19로 지친 관객들의 상처도 어루만져 줄 것으로 기대된다. 12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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