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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군주가 된 지도자, 매 맞는 선수들 [ST연중기획-한국체육, 새로운 100년을 위해③]
작성 : 2020년 10월 19일(월) 11:27

조재범 전 코치. 오랜 기간 (성)폭력을 휘둘러온 그는 법의 심판을 기다리는 처지가 됐다. / 사진=DB

스포츠투데이는 연중기획으로 '한국 체육, 새로운 100년을 위해'를 격주로 연재한다. '한국 체육, 새로운 100년을 위해'는 지난 100년간 화려한 성공 속에 가려진 한국 체육의 어두운 현실을 살펴보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한국 체육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예정이다.《편집자주》

[스포츠투데이 이상필, 김호진 기자] "다시 떠올리기 너무 힘든 기억이다."

지난 6일 수원지법 형사15부(조휴옥 부장판사) 심리로 조재범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팀 코치의 성폭행 관련 11차 공판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과거 조재범 전 코치로부터 성폭행 당한 사실을 고백한 심석희가 증인으로 비공개 출석해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심석희는 "아직도 병원을 다니며 약을 먹고 있다. (피고인이) 범행을 인정하면 되는데 왜 아직도 인정하지 않는가?"라고 분노했다. 또한 과거의 피해 사실을 증언하던 그는 "다시 떠올리기 너무 힘든 기억"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용기 있는 고백 이후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심석희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조재범 전 코치는 초등학교 5학년이던 심석희에게 처음 쇼트트랙 선수의 길을 제안했던 지도자였다. 그러나 수년간 심석희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와 피해를 남겼고, 이제는 법의 준엄한 심판을 기다리는 처지가 됐다. 검찰은 조재범 전 코치에게 징역 20년을 구형했고, 다음달 26일 선고 공판이 예정돼 있다.

2020년 실업팀 선수 인권침해 실태조사 결과보고서 / 제공=전용기 의원실


▲ 체육계 폭력 피해자 中 71.5% "지도자에게 맞았다"
불행히도 체육계 (성)폭력은 우리 사회에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조재범 전 코치 사건의 경우, 가해자가 오랜 시간 심석희를 지도한 은사로 알려져 있어 국민들에게 더 큰 충격을 안겼다.

문제는 심석희 외에도 많은 선수들이 지도자의 폭력으로 피해를 입었거나, 지금도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6월 스스로 세상을 등진 철인3종 선수 고(故) 최숙현을 가장 괴롭힌 가해자들 역시 전 소속팀 감독과 운동처방사였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 소속 전용기 더불어민주당 위원이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제출받은 '2020년 실업팀 선수 인권침해 실태조사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13.9%가 '직접적인 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폭력을 행사한 주요 가해자는 감독, 코치 등 지도자들로 무려 71.5%나 됐다.

또한 전체 응답자의 3.1%가 '직접 성폭력을 경험했다'고 답했으며, 역시 주요 가해자는 코치 등 지도자로 66.7%를 차지했다. 선수를 서포트해야 할 지도자가 체육계 (성)폭력의 주요 가해자가 되고 있는 것이 한국 체육계의 현실이다.

사진=픽사베이 제공


▲ 절대권력 휘두르는 지도자들…소리낼 수 없는 선수와 학부모
왜 대한민국 체육계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지도자들의 힘이 절대권력화 됐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유독 성적 지상주의가 심한 대한민국 체육계 풍토에서 선수들과 학부모, 지도자 모두 성적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선수 기용, 상위 학교 진학, 프로 또는 실업팀 입단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지도자의 권력은 비정상적으로 거대화되고 막강해진다.

절대화된 지도자의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은 사실상 전무하다. 이를 외부에 알리기도 쉽지 않다. 지도자의 힘이 선수와 소속팀을 넘어 해당 종목 전체에 이르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발자는 선수 생활에 더 큰 피해를 입는 반면, 지도자는 자리와 권력을 유지하는 경우도 벌어진다.

실제로 체육계 폭력 피해자들은 폭력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로 '선수 생활의 불이익을 우려하기 때문'(50.9%)이라고 답했다. 김희진 인권침해예방활동연구소 대표는 "스포츠계는 피해 상황이 발생하면 다른 분야보다도 더욱 2차 가해가 심하고, 결국 피해자가 스포츠계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서 "가해자에 대한 징계가 이뤄지더라도 현장에 있어야 하는 피해자가 일상으로 복귀가 안 되는 경우가 많아서 안타깝다"고 현실을 지적했다.

때로는 선수를 넘어 선수의 가족들에게까지 불합리한 일이 강요된다. 금전 갈취, 사생활 침해 등의 부작용이 나타나지만 '자식의 앞날'을 걱정해야 하는 가족의 입장에서는 이에 저항하기 힘들다. 허정훈 중앙대 교수(체육시민연대 공동대표)는 "부모는 알면서도 눈감아야 하고, 아이들을 다독거리며 지도자 눈치보기에 노심초사한다. 메달과 성적, 선수 기용에 지도자의 절대권력이 있기 때문"이라면서 "자식의 미래를 위해 그릇된 선택을 한 수많은 학부모들도 피해자"라고 설명했다.

▲ '사랑의 매'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체육계 폭력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수많은 제도와 대책이 마련돼 왔다. 그럼에도 체육지도자들의 절대 권력이 깨지지 않는 것은 성적 지상주의라는 근본 원인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성적 중심의 엘리트 체육에서 벗어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폭력에 대한 인식 개선도 필요하다. 유독 우리 체육계에서는 폭력의 심각성에 대해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지도자의 폭력을 '사랑의 매'라고 포장하거나 '맞을만 하니 맞지' '맞아야 버릇을 고친다'와 같은 시대착오적인 인식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점은 제왕 같이 군림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지도자는 전체 지도자의 극히 일부라는 것이다. 지도자들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와 비난은 오히려 체육계의 폐쇄성을 강화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김희진 대표는 "(폭력을 행사하는 지도자는) 일부 사람들의 이야기다. 모두가 그렇다고 싸잡아서 생각해도 안 된다. 변화하려고 하고,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 지도자들도 많다"고 강조했다.

지도자들 역시 성적 지상주의라는 구조에 갇힌 피해자라는 지적도 있다. 허정훈 교수는 "지도자들이 가해자인 것만은 아니다. 그들도 피해자다. 지도자들은 메달과 성적이 있어야 계약도, 재계약도 할 수 있다. 지도자의 평가 기준의 거의 전부가 성적과 메달"이라면서 "언제 계약해지를 당할지 모르는 불안정한 고용상태에서 메달과 성적을 내기 위해 스트레스가 과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폭력과 가혹행위를 하거나 조장하고, 때로는 묵인하면서까지 메달과 성적에 목맬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스포츠투데이 이상필 기자 sports@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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