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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석희 고백 이후 1년, 달라진 게 없었다 [ST연중기획-한국체육, 새로운 100년을 위해①]
작성 : 2020년 09월 14일(월) 14:40

1988 서울 올림픽 전경 / 사진=Gettyimages 제공

스포츠투데이는 연중기획으로 '한국 체육, 새로운 100년을 위해'를 격주로 연재한다. '한국 체육, 새로운 100년을 위해'는 지난 100년간 화려한 성공 속에 가려진 한국 체육의 어두운 현실을 살펴보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한국 체육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예정이다.《편집자주》

[스포츠투데이 이상필 기자] 1920년 조선체육회 창설 이후 지난 100년간 스포츠는 우리 민족과 함께 했다. 1936년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은 나라 없는 설움을 겪던 우리 민족이 잊고 있던 자긍심을 깨웠다. 1947년 서윤복의 보스턴 마라톤 금메달과 1948년 김성집의 런던 올림픽 남자 역도 미들급 동메달은 광복된 조국에 새로운 희망을 가져왔다.

이후에도 한국 체육은 대한민국과 함께해 왔다. '박치기왕' 김일, '짱구' 장정구, '4전5기' 홍수환의 승리를 보기 위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였다. 나라를 위해, 집안을 위해 서독에서 일했던 광부와 간호사들은 '갈색폭격기' 차범근의 활약을 보며 조국을 떠올렸다.

군부 독재 종식 후 성공리에 개최된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대한민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뤄낸 국가임을 입증하는 무대였다. IMF를 극복하고 맞이한 2002 한일 월드컵은 한국의 저력을 보여줬으며,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은 세계 평화 기여라는 올림픽의 근본 정신을 전 세계에 전파했다. 대한민국의 발전이 한국 체육의 발전이었고, 한국 체육의 성공은 대한민국의 성공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한국 체육은 현재 깊은 어둠에 빠져 있다. 지난 100년간 화려한 성공에 가려졌던 어두운 부분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특히 고(故) 최숙현 선수의 안타까운 죽음은 한국 체육계가 더 이상 어두운 면을 가리고 있을 때가 아님을 여실히 보여줬다.

스포츠투데이는 연간 기획 '한국 체육, 새로운 100년을 위해'를 통해 지난 100년 한국 체육의 어두운 현실과 그 원인을 살펴보고, 새로운 100년을 위해 우리 체육계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대한철인3종협회 스포츠공정위원회에 장윤정이 입장하고 있다 / 사진=DB


▲ 고(故) 최숙현의 억울한 죽음, 한국 체육의 슬픈 100주년
지난 6월26일 밤, 만 22살의 어린 선수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주니어 국가대표, 국가대표를 거치며 한국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을 이끌 유망주라는 평가를 받았던 최숙현이었다.

미래의 재목이 될 새싹을 짓밟은 것은 오랜 기간 지속된 전 소속팀 경주시청 지도자들과 선배들의 폭력과 괴롭힘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고 최숙현은 어머니에게 "엄마 사랑해. 그 사람들의 죄를 밝혀줘"라는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

이렇듯 벼랑 끝에서 떠밀린 고인이 의지할 곳이라고는 가족들 밖에 없었다. 선수를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전 소속팀은 팀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부조리한 일을 수수방관했다. 팀을 감독해야 할 대한철인3종협회와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는 그 역할을 다하지 않았다.

절망한 고인은 경찰과 검찰, 국민인권위원회 등 국가기관에도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들 역시 고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아무런 힘이 되질 못했다. 선수 한 명 지키지 못하는 한국 체육의 참담한 현실이 드러난 것이다.

고 최숙현의 억울한 죽음은 체육계를 넘어 대한민국을 흔들었다. 하계, 동계올림픽과 월드컵을 동시에 개최한 스포츠 선진국이라는 우리 국민들의 자부심은, 어린 선수 한 명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참담함으로 돌아왔다. 대한민국 체육계의 어두움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짙었다.

조재범 전 코치 / 사진=DB


▲ 심석희의 용기 있는 고백, 체육계는 달라지지 않았다
고 최숙현의 안타까운 죽음을 보며 우리 국민들은 1년 전을 떠올렸다. 지난 2019년 1월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는 조재범 전 코치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한국 쇼트트랙의 간판 선수이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심석희마저 오랜 시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과 아픔을 줬다.

분노한 국민들은 체육계를 향해 개혁을 요구했다. 체육계를 넘어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서도 이제는 체육계 적폐를 청산하고 혁신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일부 정치인과 시민단체들은 체육계 수장인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의 사퇴를 요구하기도 했다.

거센 비판에 직면한 체육계는 뒤늦은 수습에 나섰다. 문화체육관광부, 대한체육회를 비롯한 체육계 단체들은 체육계 (성)폭력 근절, 선수인권 보호 등을 약속하는 사과문, 결의안 등을 앞다퉈 발표했다. 향후 대책과 조치안들도 차례로 나왔다. 발표하는 단체의 이름만 다를 뿐 대부분 비슷한 내용들이었다.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체육계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문제를 알고, 정답도 안다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고 최숙현의 억울한 죽음으로 우리가 알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 체육계가 상식 밖이었다는 점이다. 또 다시 사후약방문이 반복됐다. 고 최숙현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대한체육회는 또 다시 입장문과 성명서를 연달아 발표했다. 대한철인3종협회는 스포츠공정위원회를 개최하고 가해자들에게 징계를 내렸으며, 문화체육관광부는 최윤희 2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특별조사단을 구성해 조사에 나섰다. 당장의 비판을 모면하기 위한 조치에만 급급한 모습이었다.

최숙현 청문회에 참석한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 사진=DB


▲ 권한 없는 스포츠혁신위, 의지 없는 대한체육회
그렇다면 왜 대한민국 체육계는 심석희의 고백 이후에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을까? 아무런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심석희의 고백 이후 국민들의 비판이 쏟아지자 문체부는 2019년 2월 스포츠혁신위원회를 출범했다. 정부와 민간이 머리를 맞대 체육계의 적폐를 해결하고, 개혁에 나서자는 취지였다.

이후 스포츠혁신위는 자체 조사와 연구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권고안을 작성했고, 이를 7차에 걸쳐 발표했다. 처음에는 이 권고안이 한국 체육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만 같았다. 5월 발표된 1차 권고안에서는 피해자를 보호하고 지원할 수 있는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또한 사후 보호를 넘어, 인권침해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정책 프로그램을 마련할 것과 체육계 내부로부터 독립된 전문성, 신뢰성을 갖춘 스포츠 인권 기구 설립 등을 주문했다. 대한체육회도 "엄중한 책임을 느끼며 권고내용을 적극 수용해 체육인의 인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협조할 것"이라고 호응했다.

하지만 새로운 권고안이 발표될수록 스포츠혁신위를 바라보는 대한체육회의 시선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대한체육회는 스포츠 선수 인권 보호 등에 대해서는 호응했지만,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 개선, 대한체육회-KOC 분리 등 근본적인 구조 개선에 대한 요구에는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았다"면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혁신위는 "대한체육회와 체육단체가 제시하는 의견을 존중한다"면서도 "혁신위가 출범된 근본원인은 체육계의 자정능력과 의지 부족 및 기득권 보호에만 급급했던 체육계 자체에 있음을 분명히 직시해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양 측이 서로의 주장을 반박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체육계 개혁을 위해 손을 맞잡아야 할 두 단체는 오히려 갈등 구도를 형성하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스포츠혁신위의 권고안도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권고안은 말 그대로 권고안일 뿐이었다. 스포츠혁신위는 대한체육회에 권고안을 강제할 수 없었고, 대한체육회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스포츠혁신위의 권고안을 수용할 뜻이 없었다. 결국 체육계 개혁을 위한 동력은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사퇴를 요구하는 시민단체 / 사진=DB


▲ 다시 높아진 체육계 개혁 요구 목소리, 이제는 정말 달라져야 한다
개혁의 실패는 결국 고 최숙현이라는 또 다른 희생자를 낳고 말았다. 문체부는 고 최숙현의 사건 관련 특별조사 결과를 통해 "대한체육회 등 체육단체의 안일하고 소극적인 대응과 부실 조사 등, 선수 권익보호 체계의 총체적 부실과 관리 소홀로 인해 (최숙현 선수가) 적기에 필요한 구제를 받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또한 "빙상계 폭력 사건 등을 계기로 대한체육회에서 최근 2년간 발표, 수립한 체력계 혁신과 가혹행위 근절 등 대책 과제를 조사한 결과, 세부 과제 총 46개 중 미이행 과제가 29개로 이행률이 37%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대책만 많았지 실제적으로 이행된 것은 많지 않아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했다는 뜻이다.

대한체육회는 "안타까움과 책임감을 통감하며 재발 방지를 위한 강력한 대책을 마련, 인권 친화적인 스포츠 환경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서 "체육인 교육 강화를 비롯해 엄격한 잣대 및 처벌 기준 강화 등을 통해 본 사건을 계기로 스포츠 현장에서 관행적으로 되풀이된 폭력 및 비위를 완전히 근절하기 위해 총력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지난 1년을 통해 드러난 것은 말로만 하는 약속은 현실을 바꾸는데 있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는 대한체육회와 우리 체육계가 진짜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다.

[스포츠투데이 이상필 기자 sports@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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