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현혜선 기자] 늘 새로운 배우가 있다. 이정재는 27년 동안 대중 앞에 섰으면서도 매번 다른 옷을 입고 나온다. 이는 그의 고민과 노력으로 표현됐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이정재로 완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정재는 1993년 드라마 '공룡선생'으로 데뷔해 어느덧 27년 차 배우가 됐다. 그는 그간 영화 '태양은 없다' '시월애' '하녀' '도둑들' '신세계' '관상' '암살' '신과 함께' 시리즈 '사바하' 등 굵직한 작품에서 열연하며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감독 홍원찬·제작 하이브미디어코프)로 돌아왔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마지막 청부살인 미션 때문에 새로운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인남(황정민)과 그를 쫓는 무자비한 추격자 레이(이정재)의 처절한 추격과 사투를 그린 하드보일드 추격액션 영화다. 이정재는 극 중 '백정'이라 불리는 추격자 레이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레이는 여태껏 본 적 없는 암살자의 모습이다. 파격적인 스타일링부터 짐승을 닮은듯한 눈빛, 그리고 집요한 살기까지. 섹시한 레이의 모든 것은 이정재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이정재는 "내 욕심이다. 다른 면을 보여드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어떻게 하면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렇다고 섹시해야지라는 마음은 아니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레이는 극 중 중요한 인물이고 내용과 흐름에 영향을 많이 주는 캐릭터기에 다른 방향으로 발전시켰다"며 "시나리오 자체에서는 레이를 설명하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오롯이 내 연기나 비주얼로 표현해야 됐다. 그 안에서 뭔가 더 찾아내려고 애썼다"고 설명했다.
시나리오에는 레이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었다. 레이에 대한 캐릭터 이해부터 스타일링까지 이정재의 몫이었다. 이정재는 "처음에는 레이를 전달하기 위해 대사를 조금 더 만들고 캐릭터를 보여주기 쉽게 설명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설명을 안 하고 관객들의 상상에 맡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왜 레이가 인남을 저렇게까지 맹목적으로 쫓아가야 되는지를 대사나 상황으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레이를 보는 순간 '쟤는 왠지 저럴 것 같다'가 보였으면 했다. 이유가 모습에서 해결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 그래서 스타일링과 표정으로 표현하려고 한 거였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방식이었다"고 말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이정재 /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레이는 호피 무늬, 지브라 무늬, 형형색색의 의상과 목에 짙은 문신을 하고 있다. 이정재는 "레이의 모습이 저렇게 나올 거라고 상상한 제작진은 없었다. 첫 미팅을 할 때 1차적으로 스타일리스트와 상의를 해서 룩을 잡았다. 이를 PPT로 만들어서 설명했다. 처음에 감독님이 당황하더라. 제작진이 준비한 건 더 어두운 암살자였다. 군중 안에 있으면 식별이 어려운 킬러 말이다. 빨간머리, 핑크머리, 흰 부츠, 주황색 반바지 등도 준비했는데 많이 놀라셨다. 어디까지 밀어 붙여야 되나 고민했다. 최대한 과하게 하면서 테스트를 했는데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모습들이 앵글에서는 묘하게 어울리더라"고 미소를 보였다.
그러면서 "딱 봤을 때 레이는 이유가 없어도 막 갈 것 같아야 했다. 그 정도까지 이미지를 보여줘야 되다 보니 상상이 많이 들어갔다. 상상했던 것들 중에 어떤 것이 제일 적합한지 선택해야 되는 지점이 있었는데 느낌을 유지하기 쉽지 않았다"며 "현장에서 철저히 혼자 있으면서 느낌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동료들과도 일적인 대화 외에는 잘 못해서 아쉽긴 하지만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덧붙였다.
과감한 룩을 입은 이정재는 짐승같은 표정으로 스크린을 장악했다. 특히 액션 중간중간 슬로우 모션이 걸렸을 때 표정은 압권이었다. 이를 두고 이정재는 "액션을 촬영할 때 테크니컬한 기술을 사용하면서 화려하게 보이고 싶을 때도 있고, 스킬감이 큰 액션을 보여주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런데 캐릭터 자체를 보여주는 건 순간의 표정이다. 연기자 입장에서는 이때가 가장 중요하다. 찰나의 표정 때문에 액션신 전체를 하는 거라고 볼 수 있다. 슬로우 모션으로 더 보여주고 시픈 감독과 촬영감독의 의도가 반영된 편집 기법이 사용됐다. 이걸 찍을 때도 감안해서 찍었다. 현장 편집은 우리나라가 워낙 잘 활용하고 있다 보니 극대화할 수 있었다. 그 안에서 배우가 순간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관건"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스타일링과 표정으로 전체적인 틀을 잡았다면, 이정재는 작은 소품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고 레이의 본성을 표현했다. 극 중 레이는 아이스커피를 손에 들고 다닌다. 이 역시 익히 봐왔던 암살자와는 다른, 현실의 모습이었다. 이정재는 이를 의도한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나 무서워' 이렇게 연기하고 싶지 않았다. 무서운 건 관객들이 느껴야 되는 거지 그렇게 연기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안에서 뭔가 다르게 할 수 있는 건 없나? 너무 무겁게 다니는 것보다 다른 게 없을까? 고민하다가 선택한 게 아이스커피였다. 조금 다른 게 오히려 이상하고 묘하고 독특하지 않나. 무서운 암살자가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등장하고 싶었다. 사람을 죽이러 온 사람인데 문 열고 아무렇지 않게 들어오는 걸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이스커피였다. 걸음걸이와 표정으로 만들어진 게 아닌, 일상의 작은 소품으로 해결했다"고 말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된 결과물을 보고 이정재는 희열을 느낀 장면을 꼽았다. 그는 "레이의 첫 대결이다. 대본에는 몸싸움보다는 총싸움이 많았다. 해외 첫 액션신이 셔터 안에서 레이가 태국 마피아들과 싸우는 장면이었는데, 이것도 대본에는 없었다. 실제 싸우는 장면이 아니라 셔터가 내려가고 올라가는 게 끝이었다. 갑자기 찍게된 장면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잘됐구나 생각했다. 레이의 액션신을 보여주는 목적이 아니라 레이가 상대방을 어떻게 제압하는지 그 방식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관객들은 이 장면을 보면서 '레이가 어떻게 살아왔겠구나' 상상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반가운 결정이었다. 레이의 전사가 대본에 나와있지 않지만, 이 장면 속 레이의 움직임을 통해 그의 전사를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라 좋았다"고 설명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이정재 /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또 이정재는 영화를 함께 끌고 간 황정민과의 호흡을 밝혔다. 그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를 선택한데 있어 황정민의 존재가 큰 역할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두 사람은 '신세계' 때 맞춘 호흡이 기억에 남아 주저없이 서로를 선택했다고 입을 모았다.
이정재는 "황정민과 아파트 단지가 같았다. 가족들과도 반갑게 인사했다. 팬으로서 황정민을 보고 '어떻게 저런 배우가 있었지' 싶었다. 표현이 자유롭고 직접적인 게 좋았다. 그러다가 '신세계'를 통해 호흡을 맞추게 됐다. 황정민과 함께 한다는 거 자체가 설렜고, 그와 연기할 수 있다는 사실도 좋았다. '신세계'로 만난 후 7년이 지났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를 통해 만난 황정민은 인연이었다. 아무리 같이 하고 싶어도 또 뭔가를 한다는 게 쉽지 않은데 이렇게 만나니 말이다. 같이 하게 된 만큼 더 잘 찍고 싶은 마음은 둘 다 있었다. '신세계' 때보다 연기적으로 잘하고 싶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배우와 작품을 통해 인연을 쌓고 자신만의 연기 세계를 만든 이정재는 어느덧 27년 차 배우다. 그는 쌓인 연차 만큼 한계를 느낀다고 고백했다. 그는 "오래 하다 보니 내 안에 있는 건 거의 다 꺼내 쓴 느낌이다. 상상할 수 있는 아이디어도 거의 다 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또 출연 제의를 받으면 다른 걸 보여드리고 싶은 욕망이 있으니 영혼까지 긁어서 쓰고 있다"며 "이제는 스태프들의 도움도 받는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 평상시 즐겨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의견을 구한다. 이 일을 오래 하다 보니 앞으로 들어오는 역할을 소화할 수 있을까. 예전에 했던 걸 다시 써먹는 게 아닐까. 아이디어가 도저히 안 나오는데 옛날에 했던 거 변형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뭔가 새롭게 하고 싶은 욕구는 큰데 이정재라는 사람을 너무 많이 보여드렸기 때문에 부담스럽다"고 털어놨다.
이정재는 부담은 비우고, 그 안에 새로운 것들을 채우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는 "운동을 많이 한다. 에너지와 힘이 생기면서 차오르는 느낌이 든다. 주로 웨이트 트레이닝이나 산책을 한다. 산책에서 오는 정서적 채움도 있다. 또 동료 배우들이 연기하는 걸 보면서 자극을 받는다. 이번에 황정민, 박정민이 연기하는 걸 보고 자극을 받아서 채웠다. 채워질 수 있고,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전했다.
이제 이정재는 연출자로서의 꿈을 꾼다. 단지 배우가 아닌 진정한 영화인이 되기 위해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영화 '도둑들'을 찍으면서 연출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는 "'도둑들' 촬영하기 전까지는 미국에서 배우가 연출하고 프로듀싱하고 시나리오도 쓴다는 걸 그저 뉴스로만 접했다. 미국은 뭐 그런가 보다 싶었다. 그런데 '도둑들'을 홍콩에서 촬영하고, 홍콩 배우들과 만났는데, 저번 달에는 프로듀싱을 했고, 이번 달에는 시나리오를 쓴다고 하더라. 몇 달 후에는 또 연출을 한다고 했다. 그때 세게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아 영화인이구나. 배우, 연출자로 작게 나누는 게 아니라 그냥 영화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부러웠다. 좋은 영화를 만들려면 내가 무슨 파트에서 일하든 뭐가 중요한가 싶었다. 그때 큰 자극을 받았다"고 했다.
이에 이정재는 첫 번째 연출작 '헌트'(가제)를 준비 중이다. 배우로 정점을 찍고 연출에 나선 그는 진정 영화를 사랑하는 영화인이다. 앞으로 그가 보여줄 세계가 어떨지 기대를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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