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현혜선 기자] 배우 정진영에겐 오래된 꿈이 있다. 영화감독으로 자신의 작품을 남기는 것. 이를 위해 과거 연출부 막내 생활도 잠시 했으나 두려움 때문에 접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는 다시 용기를 내 메가폰을 잡았다. 이제는 꿈에 한 발짝 다가선 정진영 감독이다.
1988년 연극 '대결'로 데뷔한 정진영은 영화 '링' '황산벌' '달마야, 서울 가자' '왕의 남자' '님은 먼 곳에', '국제시장' '강남 1970' 드라마 '동이' '사랑비' '(아는 건 없지만) 가족입니다' 등에 출연하며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어느덧 중년의 연기자로 자리매김한 정진영. 그가 이번에는 영화 '사라진 시간'(감독 정진영·제작 비에이엔터테인먼트)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다. '사라진 시간'은 한적한 소도시의 시골마을에서 외지인 부부가 의문의 화재 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해 형구(조진웅)가 사건 수사에 나선다. 그러던 중 하루아침에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상황에 빠지며 펼쳐지는 이야기다.
감독으로 인사하는 소회가 다를 터. 정진영은 "배우는 캐릭터와 연기로 평가받지만 감독은 직접 쓴 이유기와 연출 솜씨로 평가받는다. 초짜인 나는 발가벗겨진 느낌이다. 지금은 패닉 상태다. 정신이 없고 잠도 안 오고 멍하다"고 밝혔다.
정진영이 연출의 꿈에 다시 도전하게 된 건 이준익 감독의 응원이 컸다. 정진영은 "시나리오를 쓰고 이준익 감독에게 보여줬다. '참 좋은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다만 호불호가 갈리겠다'고 말해주더라. 어쨌거나 밀고 나가라고 용기를 줬다"고 전했다.
시나리오 작업을 마친 정진영은 가장 먼저 배우 조진웅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이미 형구 캐릭터를 쓸 때부터 조진웅을 염두에 뒀다고. 정진영은 "시나리오를 쓰다 보면 머릿속에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를 인물에 투영해 말투와 동작을 만든다. 실제 인물이 아니면 떠올리기 힘들더라. 구체적으로 그 인물이 머릿속에서 돌아다녀야 한다. 그런데 조진웅이 이 영화를 할 가능성은 적다고 봤다. 워낙 탑 배우고 바쁜 사람인데, 이 영화는 환경도 다르고 작다. 보낼까 말까 망설이다가 보내놓고 거절당하자 싶어서 보냈다. 그래야 빨리 다른 인물을 상상하면서 쓸 수 있고,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다. 그런데 다음날 조진웅에게서 바로 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너무 놀랍고 고마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조진웅을 비롯해 평소 배우 배수빈, 정해균 등의 캐스팅을 마친 정진영은 2018년 가을, 본격 촬영에 들어갔다. 정진영은 "가을 한 달에 찍었다. 이 영화는 낮보다 밤이 긴 시간에 어울리는 영화다. 후반작업을 마치고 가을이나 겨울에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왔다. 올가을로 넘어가나 싶었는데 상황이 가을에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더라. 상의 끝에 코로나19가 추춤한 이때 개봉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사라진 시간 정진영 감독 /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촬영한 지 약 2년 만의 개봉이다. 개봉이 밀릴수록 아쉬움이 남을 터. 정진영은 "고치고 싶은 것도 많고, 아쉬운 것도 많다. 다른 감독님들도 늘 그렇다고 하시더라. 더군다나 난 초짜로 세련된 뭔가를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어 "글 쓰는 것과 촬영 현장은 머릿속에 상을 갖고 있어서 힘들지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후반 작업과 믹싱에 대해선 상이 없었고, 프로세스도 몰랐다. 옛날 편집실과 달라져서 프로세스를 배우면서 작업하니까 힘들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정진영의 머릿속 이야기들이 글로 옮겨졌고, 이를 배우들이 스크린에 갔다놨다. 익숙한 기법에서 자유롭고 싶었다는 정진영의 말마따나 작품은 다소 난해했다. 이에 대해 정진영은 "이 영화는 설명이 많지 않은 영화다. 익숙한 영화는 설명이 친절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설명을 구석구석에 숨겨놨다. 직접 주지 않았다. 이 이야기에 따라오는 파도를 타고 가면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처럼. 이 얘긴 줄 알았는데 다른 데로 데려가는 형식이다. 재담 넘치는 할머니가 구전하는 식으로 전개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어 "어렸을 때부터 '난 뭐지?'라는 질문을 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나는 뭐지'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가 커지는 것 같다. 지금도 그렇고 이 갈등은 모두에게 존재한다. 이로 인해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걸 다르게 생각하지 않을까. 삶의 경험 속에서 느끼는 나와 진짜 내가 아닌 것에 대한 충돌이 계속 일어나는 게 아닐까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설명보다는 이미지로 보여줬다. 다 설명하면 다른 작품이 될 거다. 그러니 내가 애초에 이상한 영화를 시작한 것"이라며 "전에 썼던 시나리오는 관습적으로 써서 버렸다. 다른 식의 정서나 발상을 갖고 쓴 줄 알았는데 되게 관습적이라 놀랐다. 그걸 버리고 자유로운 작품을 쓰자고 한 게 '사라진 시간'이다. 망신당할 각오를 했다. 나중에 비판받을지라도"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작품은 실제 '나'와 남들이 보는 '나' 사이의 갈등을 담는다. 이는 실존주의 사상과도 맞닿아 있다. 정진영은 "아마 내가 실존주의를 읽은 마지막 세대일 거다. 실존주의라고 하면 어려워 보이지만 나의 실체가 뭔가를 고민하는 거고, 거기에서 부정이든 긍정이든 인정하고 살아간다. 이 작품은 실존주의를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이다. 내가 생각을 뭘 했는지, 그 생각이 무엇인지 따지지 않고 늘어놨다"고 전했다.
사라진 시간 정진영 감독 /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또 정진영은 '사라진 시간'을 보러 올 관객들에게 한마디를 전했다. 그는 "시국이 시국임에도 극장에 오라고 해야 된다"고 너스레를 떨며 "영화를 보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시간을 때우려고 볼 수 있고, 즐기러 갈 수도 있다. 신작을 즐기고 싶으신 분은 우리 작품을 보면 될 것 같다. 코로나19가 큰 장벽인데 안전 수칙을 잘 지키면서 보면 될 것 같다. 조그만 배에 올라서 달라진 파도를 오르고 항해를 해보고 싶으시면 우리 영화를 봐 달라"고 말했다.
첫 작품 상영을 앞둔 정진영. 두 번째 연출도 도전할까. 그는 "또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다. 첫 번째는 내가 하고 싶다는 이유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는 그 이유만으로 할 수 없다.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두 번째 시나리오는 더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다"고 밝혔다.
이처럼 정진영은 오랜 꿈을 갖고 관객들 앞에 설 준비를 마쳤다. 형식을 깬 새로운 작품으로 도전정신을 보인 정진영이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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