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현혜선 기자] 배우 김영민이 오랜 기다림 끝에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2020년 최고의 화제작 '부부의 세계'를 통해서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운이라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차근차근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쌓은 그의 성공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오만하지 않겠다는 김영민이다.
1999년 연극으로 데뷔한 김영민은 2001년 김기덕 감독의 영화 '수취인 불명'으로 스크린에 진출해 2008년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로 안방극장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이후 그는 2018년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선 굵은 악역 연기로 대중에게 강렬한 존재감을 각인시킨 후, '구해줘2'에서 광기 어린 목사로,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 장국영까지 변화무쌍한 캐릭터로 신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올 초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 군인 만복 역을 맡아 순수함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 김영민이 JTBC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극본 주현·연출 모완일)에 출연해 큰 인기를 끌었다. '부부의 세계'는 사랑이라고 믿었던 부부의 연이 배신으로 끊어지면서 소용돌이에 빠지는 이야기다. 김영민은 극 중 지선우(김희애)와 밀애 끝에 이태오(박해준)의 회계 정보를 넘겨주다 아내 고예림(박선영)과 갈등을 겪는 손제혁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김영민은 "작품이 끝나면 보통 아쉽거나 시원섭섭한데 '부부의 세계'는 끝날 때 이야기가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더라. 팀 분위기도 좋았고, 시청률이 좋아서 그런지 더 촬영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배우들 간의 호흡은 물론 스태프들과의 호흡도 좋아서 많이 아쉬웠다"고 종영 소감을 전했다.
극 중 손제혁은 '성관계 중독자'라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유부남임에도 여러 여자에게 눈을 돌리는 캐릭터다. 친구의 아내를 탐하고, 어린 여자에게 명품백을 선물하며 관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1차원적인 욕망에 갇힌 인물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 결핍도 있는 난해한 캐릭터다. 김영민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했다.
그는 "남자들끼리는 '너 그러고 살지 마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서로 자존심을 세우는 말이다. 자기 자신은 돌이켜 보지 않고 티격태격하는 남자들이 있다. 왠지 이런 남자들은 자신이 바람피우는 걸 자랑삼아 얘기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훈장인 듯"이라며 "당연히 남자들도 바람피우는 거 싫어한다. 이런 얘기가 나오면 '그러지 말라'고 한다. 그럼에도 계속하는 남자가 있는데, 그게 딱 손제혁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손제혁은 이태오와는 다르다. 이태오는 두 명을 한 번에 사랑한다고 말하는 인물이라면, 손제혁은 이 꽃도 아름답고 저 꽃도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도 맛있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맛있다. 여자를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우선 1차원적인 욕망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손제혁은 1차원적인 생각과 여성에 대한 욕망으로 점철된 인물이다.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는 "반응이 '사랑의 불시착' 때랑은 정말 다르더라. 그때는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응원해 주셨는데 '부부의 세계'는 작품 자체에 응원해 주시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부부의 세계 김영민 / 사진=매니지먼트 플레이 제공
김영민은 실제 주변 인물에게도 농담 섞인 핀잔을 들을 정도로 캐릭터에 몰입했다. 그는 "친구들은 바람피우지 말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아내는 시청자분들과 비슷하게 보더라. 이태오가 잘못하고 있으면 '저 모질이'라고 욕하고, 내가 잘못하면 '찌질이'라고 말하며 등짝을 때렸다"며 "예전에는 아내가 대본도 같이 봐줬는데, '부부의 세계'는 대본을 보면 드라마가 재미없을 것 같다고 안 보더라. 아내가 정말 빠져서 봤다"고 했다.
작품은 지선우, 이태오 부부 위주로 흘러간다. 손제혁의 전사는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는다. 때문에 시청자들은 손제혁이 아내를 두고 끊임없이 새로운 여자를 찾는 과정을 보고 어떤 전사가 깔려 있는지 궁금증을 보였다. 이에 김영민은 "많은 사람들이 손제혁의 바람이 내면에 결핍으로 비롯된 게 아니냐고 하시더라. 전사를 결핍이라는 키워드로 만들진 않았지만, 이런 인간은 결핍돼 보이기 마련이다. 손제혁은 정말 단순한 사람이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한 번에 못 한다. 내가 이런 행동을 했을 때 상대가 어떤 상처를 받고, 어떻게 주변이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고 설정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단순한 손제혁이지만 지선우를 대할 때만큼은 다르다. 지선우에게는 더 나아가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연기했다. 지선우에게는 단순히 바람피우는 것만 원한 게 아니라 마음까지 둔, 사랑에 가까운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작품이 더 풍성해질 거라고 판단했다. 마음을 줘야 고예림, 이태오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래야 복잡한 관계가 생길 거라고 여기며 손제혁을 구축했다"고 덧붙였다.
김영민의 손끝에서 완성된 손제혁은 결말까지 그 자체였다. 김영민은 "고예림은 손제혁을 사랑하지만, 머리에서 불륜이 지워지지 않는다. 사랑하는데 용서가 안 되는 상황이다. 결국 두 사람은 이혼을 했다. 비극적인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고예림은 독립적인 인생을 만들며 자신의 길을 찾는다. 손제혁도 재혼한다. 이렇게만 보면 행복해 보이지만 짝을 잃는 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손제혁은 짝은 놓쳤지만 인생은 찾았다. 그게 손제혁의 마무리가 아닐까"라고 말했다.
바람을 피워서 이혼하고, 다시 새로운 가정을 꾸린 손제혁. '그를 고쳐 쓸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김영민은 한 번은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그는 "손제혁의 마음의 흐름을 봤을 때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 당연히 잘못됐고, 욕을 먹어야 된다. 그런데 손제혁은 윤리적인 생각이 마음에 들어온 상태다. 중요한 건 부부가 서로 상처를 주지 않으려면 경각심이 필요한데, 손제혁은 경각심을 뼈에 새겼다. 마음을 잡은 사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김영민은 실제 어떤 남편일까. 그는 그저 보통의 남편이라고 말하며 쑥스러운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보통 남자들과 똑같다. 아내가 좀 무섭고 차분한 스타일이다. 그래서 심하게 싸우지도 않는다. '부부의 세계' 하면서는 좀 더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잘 해야 된다는 게 아니라 서로의 행복을 위해 좀 더 배려해야 한다. 아내나 남편의 역할에 빠지는 게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해야 오래 지속되고 깊은 사랑이 유지될 수 있다. 그렇기에 남자도 요리하고 설거지도 해야 된다"고 했다.
부부의 세계 김영민 / 사진=매니지먼트 플레이 제공
'부부의 세계'는 28.4%의 시청률(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로 종영한 화제작이다. 종편, 케이블에서 인기를 끈 작품인 '도깨비', '사랑의 불시착', '스카이 캐슬'의 시청률을 모조리 깼다. 김영민은 "시청률이 20%를 넘겼을 때 기분이 너무 좋았다. 내가 운이 좋은 것 같다. 살짝 겁도 난다. 잘 된 만큼 떨어질 것 같다. 언제나 잘 될 순 없고, 오르락내리락 할 텐데. 잘 될 때는 잘 되고, 안 될 때는 안 될 수 있지만 어느 작품 하나 안 되려고 한 작품은 없다. 그저 내가 하는 작품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시청률만 생각하면서 촬영에 임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오만하지 않으려고 자신에게 다짐하는 중"이라고 털어놨다.
김영민은 1999년에 데뷔해 최근에서야 큰 관심을 받게 됐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 동안 묵묵히 배우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건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는 소망 때문이었다. 그는 "연극을 했던 경험이 크다. 연극에서 힘든 사람은 많아도 부자가 된 사람은 없다. 다만 드라마나 영화처럼 많은 관객이 오는 건 아니지만 누군가 올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내 캐릭터, 내 작품 하나하나가 세상을 좋게 하는 데 있어서 조그마한 힘이 될 수 있다는 의지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끝으로 김영민은 앞으로의 목표를 전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어떤 스타일의 캐릭터를 해야 된다는 마음은 없었다. 지금까지 잘 쌓아 두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작품은 잘 됐는데,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인가 의문도 든다. 그냥 좋은 행보를 걷는 배우가 되고 싶다. 좋은 길을 가고 있는 배우로 관심 받고 싶다"고 희망했다.
이렇듯 김영민은 '부부의 세게'를 만나 손제혁을 연기하며 사랑을 받은 게 운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것은 그가 오래도록 쌓은 필모그래피와 연기를 향한 열정에서 온 것이다. 이제 자신이 쌓은 걸 더 보여줄 일만 남은 김영민. 앞으로의 김영민이 기대되는 이유다.
[스포츠투데이 현혜선 기자 ent@st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