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현혜선 기자] 뼛속까지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찬 배우 이제훈에게는 꿈꾸는 세상이 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마음껏 영화를 즐기고, 각자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곳이다. '사냥의 시간'이 공개되고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며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지금처럼 말이다. 영화가 있는 곳이 곧 유토피아라고 말하는 이제훈이다.
2011년 영화 '파수꾼'을 통해 제48회 대종상영화제 신인남자배우상을 수상한 이제훈이 또 한 번 '파수꾼'의 윤성현 감독과 의기투합했다. 이번에는 새로운 인생을 위해 위험한 작전을 계획한 네 친구와 이를 뒤쫓는 정체불명 추격자의 숨 막히는 사냥의 시간을 담아낸 추격 스릴러 '사냥의 시간'(감독 윤성현·제작 싸이더스)다. 이제훈은 극 중 새 출발을 꿈꾸며 무모한 계획을 세운 준석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윤성현 감독과 9년 만의 만남이다. '사냥의 시간'은 윤성현 감독이 '파수꾼' 이후 9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기도 하다. 그간 이제훈은 영화 '고지전' '건축학 개론' '분노의 윤리학' '파파로티' '박열' '아이 캔 스피크', 드라마 '비밀의 문' '시그널' 등에 출연하며 차근차근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이제훈은 윤 감독과의 만남에 대해 "'파수꾼' 이후 9년 만에 나온 작품인데, 그 시간 동안 계속 만나면서 영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제는 영화 동지라고 생각한다"며 "만약 '파수꾼'이 없었다면 내 배우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나에겐 중요한 작품이다. 배우로서 태도와 자세를 윤 감독이 깨닫게 해줬다. 사실감에 대한 걸 많이 배웠다. 이후에도 작품을 하면서 항상 사실감에 대한 부분, 메서드 연기 접근법을 투영했다. 이걸 형성하고 굳건하게 뿌리내려주는 데 중요한 존재가 윤 감독이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윤 감독은 9년 동안 작품을 준비하는 기간이 길었다. 얼마나 현장에 나오고 싶었겠으며 완성된 영화를 보고 싶었겠냐. 윤 감독이 더욱 단단해졌구나를 현장에서 많이 느꼈다. 굳이 둘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영화에 대한 만족도나 매 장면마다 도달하고 싶은 지점이 비슷해서 계속 욕심냈다. 그 시너지로 지금의 '사냥의 시간'이 탄생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덧붙였다.
다만 '사냥의 시간'은 윤 감독이 '파수꾼' 이후 처음으로 들고 나온 작품이기에 '파수꾼'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게 아니냐는 반응도 있었다. 이에 대해 이제훈은 "연기적인 측면에서 앙상블을 이룰 때, 대사로 만들 수도 있지만 애드리브로도 가능했다. 이게 윤 감독이 추구하는 연기 방식이다. 틀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살아 있는 무언가가 벌어지길 바라는 것 같다. 그래서 '파수꾼'의 연장선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다"며 "특히 배우 박정민과 연기할 때는 '파수꾼' 생각이 많이 났다"고 말했다.
'사냥의 시간'에 출연한 박정민 역시 '파수꾼'을 통해 윤 감독, 이제훈과 호흡을 맞췄다. 이제훈은 "이 작품을 통해 함께한다는 데서 의미가 컸다. 이 과정은 분명 새로운 시도고 어떻게 봐줄지 쉽게 예상할 수 없었지만, 의미 있는 작품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고 작업했다. 박정민과의 호흡 역시 윤 감독의 세계에서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어서 영화를 찍는 과정의 큰 재미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처럼 윤 감독이 추구하는 애드리브와 박정민, 이제훈의 연기 호흡이 만나 시너지 효과를 냈다. 이제훈은 "영화 초반을 빼면 상황에 대한 지문들이 많았다. 초반에 준석이 출소해서 술을 마시며 떠드는 장면이나 상수(박정민)에게 윽박지르는 장면이 애드리브였다. 박정민이 너무 잘 받아줬다. 윤 감독도 그냥 놀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우리끼리 상상을 많이 해보며 애드리브를 많이 넣은 것 같다. 나도 할 때는 연기를 어떻게 하고 계산을 어떻게 할지 생각도 안 하고 그냥 했다. 서로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해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걸 즐기고 상황에 빠져들고 있구나를 느끼는 순간들이었다"고 했다.
'사냥의 시간'은 윤 감독의 세계관 안에서 '파수꾼'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감정을 극한까지 내몬다. 배우로서 감정적으로 힘들었을 터. 이제훈은 "'파수꾼' 때는 인간적인 관계가 틀어짐에 따라 사람의 나약함을 표현하려고 했다면, '사냥의 시간'은 그것과 동시에 죽음에 맞닥뜨리고 누군가에게 쫓기는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나는 좀 힘들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경험을 직전까지 한다는 게 내 인생에서는 없는 일이었다"며 "학창시절 때 돈 뜯기기 직전의 두근 거림, 등하굣길에 골목에 왠지 학교 선배가 서 있을 것 같아서 뒤로 도망가는 모습, 혹은 수영을 못하는데 물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순간, 산에 올라가는데 자칫 균형을 잃다가 낭떠러지에 목도했던 순간. 매우 아찔하고 지금도 생각하면 내가 죽었을 수도 있겠구나에 대한 상상을 하게 된다. 그것들을 매번 현장에서 느끼려고 해서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해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누군가에게 쫓기고, 뛰고, 공포에 사로잡힌 순간을 환경 속에서 느끼려고 하니까 괴로웠다. 그걸 극복할 수 있고 유지할 수 있었던 건 현장에 있었던 배우들과 스태프, 그리고 윤 감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만하고 싶다', '도망가고 싶다', '언제까지 할 수 있지', '내가 뭐 하자고 지금 준석을 연기하고 있지'란 생각이 들었다. 그게 계속 날 지치게 만들었다"며 "그럼에도 후회하지 않았던 건 이 작품을 완성해가는 과정과 빨리 이 작품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다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또 이제훈은 '사냥의 시간' 결말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그는 "영화가 시간 순서대로 간다. 처음엔 왁자지껄하다가 한 명씩 떠나고 불안에 떤다. 이 과정이 외로웠다. 마지막에 크랭크업 되고 축하를 받았는데 홀로 남겨진 나는 상실감을 느꼈다. 분명 준석은 유토피아에 도달했지만 불행한 인생이다. 그래서 준석은 돌아간다. 단순하게 복수로 볼 수 있으나 이제는 사냥감에서 사냥꾼으로 바뀐다는 은유적 의미"라며 "인생에 대한 선택과 그 선택을 내가 했을 때 오는 결과를 받아들일지 회피할지 예단할 수 없다. 만약 나라면 그런 상황에서 어떤 태도로 세상에 맞설지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사냥의 시간'은 디스토피아적인 상황을 다룬다. 준석은 꿈꾸는 유토피아로 가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다. 실제 이제훈이 꿈꾸는 유토피아가 있을까. 이제훈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영화가 개봉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봐주며,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지금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의 유토피아는 지금이다.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있을지언정 그것조차도 나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각을 공유하는 게 좋다. 내가 미쳐 생각하지 못한 해석과 보지 못한 부분을 누군가가 일깨워줄 수 있고, 설득할 수도 있다. 이 과정을 즐긴다. 이번 작품은 특히 해외 반응까지 볼 수 있어서 더 좋다"고 털어놨다.
이어 "나중에 돈을 엄청 많이 벌면 극장을 만들고 싶다. 거기서 좋아하는 영화도 보고 GV도 많이 했으면 좋겠다.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에 빠지는 순간들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에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길 바란다"며 "누군가가 부자가 될래, 배우로 평생 살래라고 물으면 주저 없이 배우를 선택하겠다. 계속 영화를 하는 것에 대한 꿈을 꾸면서 살고 싶다. 돈이 꿈이 될 수 있지만, 수단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영화사를 만든 이제훈은 배우에서 제작자로 영역을 넓혔다. 어떤 방향성을 꿈꾸며 시도했을까. 이에 대해 그는 "배우로서 작품을 할 때 연기만 잘 하면 되지 않냐. 그런데 난 더 소통하고 싶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동시에 내가 배우를 자의든 타의든 안 하거나, 못 하게 됐을 때 어떤 인생을 살지 고민하다가 선택하게 됐다. 스스로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물었을 때 영화 생각 밖에 안 나더라. 조명 스태프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촬영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영화와 관련된 모든 일이라면 다 좋았다"고 말했다.
이제훈은 "그렇기에 제작자가 되면 디테일과 깊이를 더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꿈꾸게 됐다. 지금은 제작자에 대한 꿈을 시도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앞으로 어떤 결과물을 보여드릴지는 모르겠지만, 내려놓지는 않을 거다. 항상 영화에 있어서 무게감과 책임감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처럼 이제훈은 영화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다. 꿈꾸는 유토피아 역시 영화 그 자체라고 말할 정도다. 앞으로 이제훈의 영화 세상과 더불어 그가 만들고 싶은 극장이 탄생하길 바란다.
[스포츠투데이 현혜선 기자 ent@st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