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 옛날,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 보름산에 살던 보름이와 산이는 어느 비 오는 여름날 그림책을 읽고 있었다. 보름이와 산이는 궁금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그림책은 무엇일까?” 너무 궁금한 나머지 둘은 휘영청 밝은 달과 높고 높은 산에 부탁하여 전국의 담벼락에 방을 붙였다.
‘알립니다. 제일 재미있는 그림책을 가진 이는 추석날 보름달이 동쪽 하늘에 떠오를 때 경기도 김포시 고촌읍 보름산에 모여 주세요. 대상을 수상한 이에게는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 드립니다.’
대회 날이 되자 각자 보자기에 그림책을 소중히 담아 왔는데, 모인 이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서울에 사는 임금님, 안동에 사는 선비, 평양에 사는 기생, 그리고 보름산 기슭에 사는 염소.
황공하게도 임금님이 오셨으니 첫 순서는 그의 몫이다.
“내가 가져온 그림책은 풍속화첩이라고 하오. 그대들도 알다시피 내 비록 겉은 화려해 보이나 구중궁궐에 갇힌 몸이니 세상사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만 할 뿐이지 아는 바가 하나도 없소. 그래서 도화서 화원들에게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그리게 했는데, 만들고 보니 이게 보는 재미가 쏠쏠하오. 서당에서 훈장에게 회초리 맞는 녀석의 표정을 보면 누구나 울다 웃다 할 것이오.”
《단원풍속도첩》 중 ‘서당’, 김홍도, 18세기, 수묵채색화, 종이에 담채, 26.7×39.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 화첩으로 조선 풍속화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그림들이 실려 있지만 요즘 진본이다, 위작이다, 모사본이다 등의 논쟁이 뜨겁다.
산 넘고 물 건너 먼 길 걸어온 선비가 두 번째 순서로 나선다.
“풍속화야 임금님께만 특별하지, 우리야 살면서 늘 보던 것들인데 그게 뭐 그리 재미있겠소. 내가 가져온 그림책을 한번 보시오. 사랑방에서 글공부하다 지쳤을 때 잠깐 짬을 내어 산수화첩을 넘기면 금강산 구석구석이 내 방안으로 들어온 듯하오. 현세의 어려움을 굳이 외면하고 싶을 때 이 그림들을 보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소.”
《신묘년 풍악도첩》 중 ‘금강산’, 정선, 1711년, 비단에 엷은 색, 37.4×36.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선의 작품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인 36세 시절에 그려졌다. 금강내산을 하늘에서 내려다 본 듯한 시점으로 포착하였다. 산봉우리마다 명칭을 적어 놓고 길을 뚜렷이 표시한 것은 지도 그림의 영향을 보여준다.
꽃가마 타고 멀리 마실 나온 기생이 세 번째로 어여쁜 얼굴을 내민다.
“아이고, 귀한 분들 가식을 언제까지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소. 기생 생활 3년만에 나는 그림책 중에 제일 재미있는 건 춘화첩이라고 확신했다오. ‘잘 팔린 책’ 집계에 해당되지 않아서 그렇지 책방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오. 한다하는 화원들도 돈은 춘화첩으로 번다잖소. 솔직히 말해 보시오. 다락 속, 장롱 속, 항아리 속에 한 권쯤 갖고 있지 않소?”
《건곤일회첩》 중 ‘춘화 보는 여인들’, 신윤복, 1844년 경, 종이에 수묵담채, 38.5×28cm
춘화는 그 나라의 정서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몽골 것은 말 타고 사랑을 나누고, 인도 것은 요가를 보는 듯하고, 중국 것은 뻥이 세고, 일본 것은 괴기한 느낌이다. 그에 반해 우리 춘화는 배경을 강조하며 서정성과 유머를 유독 즐긴다.
풀을 뜯으며 이들의 대화를 듣던 안경 낀 염소가 물끄러미 고개를 들어 이들을 쳐다본다.
“지금은 늙어서 기력이 없어 보이지만, 나도 소싯적에는 참 잘 나갔소.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성이 안 차서 책을 한 장씩 뜯어먹었더니 사람들이 나를 ‘책 먹는 염소’라고 부르더구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흐려지는 게 당연한데도, 기억이 사라지면 내 삶도 사라지는 것 같아 절박하게 매달리던 시절이었지. 행여 염소의 삶이라고 무시하지는 말아주시오.”
염소는 ‘음매’하고 울며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회한에 젖어 말을 이어 갔다.
“나이 들어 눈까지 침침해져서 난감하던 차에 어느 날 보니 세상에 그림책이란 게 있지 않겠소. 알고 보면 책읽기는 몸과 정신의 에너지를 적잖이 소모하는 일인데, 그림책은 크게 신경 쓰며 글자를 읽지 않아도 되고, 함께 실린 그림들은 글자 이상으로 많은 것을 설명해 주더구려. 그러면서 책이란 게 읽기만 하는 게 아니라 보기도 하는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오. 반대로 그림도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읽기도 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지. 지금은 말이오, 수많은 책보다는 내 서재 한쪽 벽에 걸어둔 책거리 그림이면 충분하다오. 책을 그린 그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책이 뿜어내는 기운을 느낄 수 있으니 어쩌면 이것이 한평생 책에 배고파한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그림책이 아닌가 싶소.”
글·사진 장다운 보름산미술관 소장
조병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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