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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산편지] 혈당 이기진 선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
작성 : 2014년 09월 23일(화) 18:27

혈당 이기진 선생

생김새나 성격은 마치 프랑스 파리의 동네 아저씨처럼 어설픈데, 알면 알수록 전설적인 느낌을 풍기는 사람을 나도 한 명쯤 알고 있다.

만화가 이상무가 그린 ‘독고탁’. <공포의 외인구단>에 등장하는 ‘설까치’와 쌍벽을 이루었던 1980년대 유명 야구 캐릭터다.


이기진 교수의 꼴라쥬

Scene #1 야구를 좋아하는 나는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김없이 야구 이야기를 나눈다. 어느 날 모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관심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야구를 주제로 수다를 떨었다. 그런데 운동하고는 별로 친할 것 같지 않은 현직 물리학과 교수인 선생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예전에,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이상훈, 선동열이 이어 던지며 경기를 마무리할 때 정말 짜릿했는데…. 제가 야구는 그때까지만 봤잖아요. 그 후론 야구에 재미를 별로 못 느껴서 안 봐요.” 이때까지만 해도 선생이 단지 대화에 동참하고 싶어서 거드는 것이라고만 여겼다.

“교수님도 야구 좋아하세요?” 그냥 형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에이, 제가 초등학교 때 야구부를 만들었잖아요. 5학년 때요. 담장 하나를 두고 옆에 붙어 있는 중학교에 다니는 형을 코치로 초빙도 했어요. 저는 포수를 봤어요. 팀의 리더이자 중심은 역시 포수잖아요.”

그 당시에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흘려듣고 넘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선생 외모가 야구 만화 주인공 ‘독고탁’을 빼닮긴 했다.

아르메니아 과학아카데미 연구원 시절 이기진(사진 가운데)

Scene #2 선생의 연구실에는 아르메니아에서 외국인 학생들이 많다. 자연스레 아르메니아라는 나라가 물리학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아르메니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1,000미터 이상의 산악지대이고, 날씨도 맑고 건조해서 고대로부터 천문학과 점성술이 발달했어요. 덕분에 구소련 시절 천체물리학의 중심이었죠.”

이름도 생소한 내륙 국가 아르메니아가 물리학의 중심이라니 좀 놀라웠다. “그래서 지금도 아르메니아에 자주 가시는 건가요?” 선생은 겸연쩍게 웃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지금이야 허블 망원경으로 우주를 바라보는 시대이니 굳이 아르메니아까지 갈 일은 없어요. 실은 제가 아르메니아랑 인연이 깊어서 연구를 핑계로 자주 가는 거죠.

1992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전쟁 때 같이 연구하던 친구들과 함께 전장에 나갔어요. 거기서 ‘대한민국 군대 태권도’를 가르쳤지요. 그런데 당시 함께했던 아르메니아 친구가 지금 교육부장관이 되었어요. 덕분에 아르메니아에 가면 공항에서 귀빈 대접(아르메니아에서 가장 좋은 차인 소나타가 마중을 나온다)을 받아요.”


1992년이면 큰딸 채린이가 1살 때다. 전화를 붙잡고 가족들이 울고불고 난리였다는데, 이건 뭐 ‘스위스 용병’도 ‘체 게바라’도 아니고, 남의 나라 전쟁까지 참견하는 선생의 호기심 가득한 오지랖을 어떻게 말릴 수 있을까?

잡다구리 수집가의 면모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이 교수의 연구실

Scene #3 선생의 연구실에 물리학 관련 전문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좋게 이야기하면 골동품, 나쁘게 이야기하면 온갖 잡동사니만 방에 한가득하다.

애당초 예술을 해야 할 사람인데 멋모르고 물리학이라는 길로 잘못 들어선 것은 아닐까? 잔뜩 의심을 품은 채로 도대체 연구는 언제 하시냐고 ‘돌직구’를 날렸다. “에이, 연구 열심히 하죠. 정 못 믿을 것 같으면 ‘혈당 이기진’이라고 검색을 해보세요.”

어, 어, 어!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검색 결과가 줄줄이 이어지면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전파를 이용한 혈당 측정 장치 및 방법’에 관한 기술로 세계지적재산권기구상을 수상하였다는 기사가 단연 눈에 띈다. 간단히 요약하면 채혈을 통하지 않고 전파를 이용하여 휴대폰 등으로도 간단하게 체내 혈당을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인데, 상업화만 이루어진다면 바이오벤처 재벌 등극도 시간문제다.

“아니, 교수님! 그림 그리시면서 언제 연구까지 하셨어요?” 개연성 없는 막장 드라마 한 편을 본 것 같은 얼굴로 따지듯 물었다. “물리학과 예술이 별로 다르지 않아요. 오히려 서로 영감을 불어넣죠. 저는 피카소나 달리 같은 예술가들이 당대 물리학에 상당히 조예가 있었다고 봐요. ‘차원’의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실제로 물리학자들과 교류가 있었다는 기록도 많고요. 심지어 물리학은 예술뿐만 아니라 종교와도 일맥상통해요.”

2NE1 CL에게 보내는 아빠의 생일카드


딸 채린이는 사랑하지만, 2NE1 CL은 질투하는 아빠. "제 트위터나 페이스북에도 좀 들어와주세요. 외로워요."

Scene #4 “채린이를 어떻게 키우셨어요?” 지난 3월 1일, ‘소녀시대’와 동시에 컴백한 ‘2NE1’ CL(채린)의 성장기 교육이 궁금했다. “에이, 전 한 거 없어요. 그냥 돈 달라고 하면 달라는 액수보다 조금 더 넉넉하게 주었어요. 부모가 해줄 게 그거 밖에 없잖아요.”

넉넉한 살림살이 티내시는 것도 아니고 이건 또 무슨 의도일까? “저는 채린이가 나중에 가수를 안 하게 되더라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요. 스스로 알아서 하고 싶은 걸 또 찾아가리라는 믿음이 있어요. 어려서부터 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 공부해야 하니 나중에 하라며 말리지 않았어요. 오히려 어설프게 하지 않고 끝을 볼 수 있게 했어요. 예를 들어, 책을 좋아하면 자기가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최종적으로 인쇄하여 서점에서 파는 진짜 책처럼 만들어보고, 옷을 좋아하면 자기가 디자인한 옷을 실제로 입을 수 있는 수준까지 만들어보는 식이지요. 그렇게 최종 결과물까지 만들어본 경험이 많으면 새로운 일을 할 때도 두려움이 없어져요.”

[사랑, 고무판화, 25×40cm, 1985 or 1986] 서강대학교 미술 동아리 ‘강미반’ 출신의 홍윤표 만화가에게 우연히 듣게 된 일화. “한번은 이기진 선배가 체육관 지붕에 그림을 그리는 바람에 학교가 발칵 뒤집힌 적도 있어요.” 그러나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 Art for art’s sake)적인 그의 작풍(作風)은 당시 운동권 학생들에게 외면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다.

Scene #5 얼마 전에는 광화문 근처에 ‘창성동 실험실’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적 연구 공간을 열었다. 말로 표현하려니까 고상하게 ‘문화적 실험’이지 실상은 주말에만 하루 이틀 게릴라적으로 전시를 하면서 한쪽에서 생맥주를 마시는 게 일이다.

갤러리에 걸릴 법한 작품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오래된 장인의 구두라든가 숙련된 미캐닉을 거쳐간 오래된 자전거, 소품을 만드는 젊은 디자이너들의 새로운 가방 등과 같은 생활 속 아이템도 주저 없이 전시한다. 언뜻 보면 아무거나 걸리는 대로 막 전시하는 모양새이다.

그 와중에 기무라 타쿠미(Kimura Takumi)라는 일본인 예술가의 전시도 창성동 실험실에서 열리고 있어 잠깐 들렀다. “일본 작가신데, 여기 교수님이랑은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피차 안 되는 영어로 간신히 질문과 대답을 이어갔다.

“1980년에 민주화운동이 벌어지던 광주에서요. 저는 ‘진짜 한국’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결혼하고 신혼여행으로 광주를 갔는데, 당시 대학생이었던 이기진 교수를 거기서 우연히 만났어요.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네요.”

내가 아는 내용만 간추린 선생의 이야기가 이 정도다. 여러 인생 경험이 놀랍다기보다는 한 사람의 인생에서 맥락을 잡아내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수도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어쩔 수 없이 각각의 장면(scene)을 나열하는 선에서 소개 글을 정리하였다. 장면으로 나눈 글쓰기는 선생 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인데, 이렇게 난감한 글엔 정말 제격이다.

P.S. 오랫동안 다닌 회사를 그만둔 후 선생을 만났다. “교수님, 할 일도 많고 전보다 재미있게 일할 수 있어서 좋기는 한데 처자식을 생각하면 순간순간 가슴이 떨리고 두려워져요.” 시큰둥하게 혹은 시크하게 선생이 대답했다. “에이 뭐, 적게 쓰면 되죠. 별로 걱정할 일이 아니에요.”

글·사진. 장다운 보름산미술관 소장


조병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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