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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나고 신묘한 '판소리 복서'의 탄생 [무비뷰]
작성 : 2019년 10월 09일(수) 08:00

영화 판소리 복서 리뷰/사진=영화 판소리 복서 포스터

[스포츠투데이 한예지 기자] 마치 낡은 명랑 코믹 스포츠 만화를 넘겨보는 듯하다. 오래된 색감과 정서, 독특하고 과장된 화법, 기묘하고 이색적인 소재. 그러면서도 몽롱하고 아련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 '판소리 복서'다.

제목만 봐도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판소리와 복싱의 결합, 이를 소재로 한 정혁기 감독의 단편 영화 '뎀프시롤: 참회록'의 확장판, 영화 '판소리 복서'(감독 정혁기·제작 폴룩스 바른손)다.

영화의 주무대는 낡디 낡은 불새 체육관. 한때는 챔피언을 꿈꾸던 프로 복서 지망생들의 땀과 열정이 뿜어져 나오는 곳이었으나 현재는 볼품없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이를 운영하는 박관장(김희원), 체육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전직 프로복서 병구(엄태구)가 있다. 그리고 병구가 열심히 돌린 '다이어트 복싱 전단지'에 낚여(?) 살을 빼보겠다며 찾아온 민지(이혜리)까지. 이처럼 평범하면서도 범상치 않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영화는 병구의 "이상한 꿈을 꾼 것 같다"는 말로 시작되고, 실제로 병구가 민지의 응원에 힘입어 잊고 있던 꿈을 다시 꾸기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병구는 마흔 살에도 권투를 했던 세계 챔피언 조지 포먼을 롤모델 삶아 29세의 나이에 다시 복싱을 시작하겠다고 한다. 웬일인지 박관장은 이를 들은척 만척하며 피한다.

병구가 시종일관 입에 올리고, 유기견의 이름으로까지 붙여주는 조지 포먼은 영화에서 상당히 중요하고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조지 포먼은 복서로서는 재기 불능한 '퇴물' 취급을 받던 나이에 다시 링에 복귀하고 46세의 나이로 헤비급 통합 챔피언이 된 인물이다. 꿈을 꿀 수만 있다면 성취할 수 있는 길은 분명히 있다. 과거의 실패를 통해 배우되 과거의 노예는 되지 말자는 것이 조지 포먼의 인생 신념이었다.

병구가 다시 링에 오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주위의 부정적 반응도 당연하다. 하지만 병구는 여러 가지 제약적 상황에서도 체념하지 않고 제 인생을 스스로 결정한다. 과거의 실수를 반성하고 자책하며 불가능한 꿈에 도전하는 것. 그 값진 가치를 과거와 달라진 병구는 이제야 비로소 체화한다. 그렇기에 꿈을 꿀 수 있다.

병구의 꿈의 여정을 쫓아가다 보면 이상하면서도 웃기고 슬픈, 이토록 기묘한 감정이 쉼 없이 달려든다. 어수룩하고 엉뚱한 병구의 모습 이면엔 펀치드렁크 증상으로 악화되는 뇌 기능이 있고, 요즘 누가 복싱하냐며 이종격투기에 빠진 아이들에 훈계하려다 암바 기술에 걸리는 관장이나, 고장 나서 못 쓰는 TV를 고칠 수 없다고 버리라는 AS기사의 말에 난투극에 가까운 소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는 지극히 과장된 코미디인데 그렇게 짠할 수가 없다. 시대가 변했다며 변화를 쫓지 못하는 이들을 구식 삼류 취급하는 이들의 시선도 꽤 냉정해서 서럽다.

그렇기에 별 볼 일 없는 병구가 점차 모든 것을 잃어가고 잊혀질 두려움 속에서도 '판소리 복싱'에 대한 꿈만은 잊지 않으려 강한 의지를 비추는 모습은 의미 깊다. 그토록 만류하던 박관장이 결국 제 모든 것을 걸고 병구를 링 위에 세우는 모습까지. 대견하고 애틋하다. 이같은 모습을 통해 사라지거나 버려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과 위로를 전하는 영화다.

영화 판소리 복서 리뷰/사진=영화 판소리 복서 스틸


이토록 따스하고 애잔한 온기가 가득한데도, 이를 절대 감성적으로 그려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 만족스럽다. 민지와 병구의 풋풋하고 사랑스러운 로맨스, 병구의 줄넘기 동작으로 강풍기 효과를 맞는 민지와 박관장의 실감 나는 표정 연기까지 과장되면서도 신선한 컷의 연속이다. 병구가 장구 소리에 맞춰 판소리 복싱 스텝을 밟고 점점 무아지경에 돌입하는 모습은 코믹하면서도 의외로 꽤 신명 난다. 또한 이는 꿈에 대한 열정이 지나친 욕심이 됐고 이로 인해 소중한 것을 잃은 후회와 자책, 오랜 시간 고독하게 자신을 책망하던 병구가 비로소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는 의미를 담아 더욱 강렬하게 와 닿는다.

'판소리 복서'는 마지막까지 전형적인 스포츠물의 전개를 따르지 않고 과감하게 비튼 결말로 강한 훅을 날린다. 복싱은 챔피언만이 영광의 자리를 누릴 수 있는 상징적 스포츠다. 하지만 영화는 이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 마치 병구의 말처럼 "이상하고 굉장히 긴 꿈"을 꾼 듯한, 몽롱한 여운을 남길 뿐이다. 대중적인, 그리고 상업적인 화법과 전개는 아닐지라도 낯설고도 흥미로운 영화의 탄생이다.

괴짜 참스승 박관장 역의 김희원은 평범한 듯 독특한 인물로 단단하게 무게 중심을 잡는다. 코미디와 정극의 간극을 능수능란하게 오가는 생활 연기가 일품이다. 엄태구는 병구 그 자체로 더벅머리에 베베꼬는 몸짓까지 사랑스럽다. 혜리는 맞춤형 캐릭터를 제대로 만났다. 세 배우의 훈훈한 호흡이 보기 좋게 흐뭇하다. 10월 9일 개봉.

[스포츠투데이 한예지 기자 ent@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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