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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숙, 세상 모든 '민재희'들에게 [인터뷰]
작성 : 2019년 07월 29일(월) 09:30

하재숙 / 사진=팽현준 기자

[스포츠투데이 이호영 기자] "멍청한 잣대로 감히 널 평가하다니. 너는 존재 자체로도 소중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아름다워."

배우 하재숙이 '민재희'들에게 전한 말이다. '민재희'는 지난 23일 종영된 KBS2 월화드라마 '퍼퓸'(극본 최현옥·연출 김상휘)에서 하재숙이 연기한 중년 여인의 이름이다.

하재숙이 일컫은 민재희는 역할에 한정되지 않는다. 남녀 혹은 노소로 구분 짓지도 않았다. 뚱뚱하든 마르든, 못생기든 잘생기든, 키가 작든 키가 크든 저마다의 결핍을 지녀본 모두가 민재희다. 티끌 하나로 태산 같은 노력을 무시받고, 서러워 울어본 이 세상 모든 이들이 바로 민재희란다.

극 중 민재희는 결핍 투성이의 인간이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결심한 경력 단절녀다. 남들에 비해 비대한 몸을 지녔으나, 모델을 꿈꾼다. 간절히 소망하던 어느 날 그에게는 향수 하나가 배달된다. 향수를 뿌린 그는 20대 시절 모습으로 돌아가 민예린(고원희)의 삶을 누린다. 잊고 지냈던 꿈과 사랑을 모두 이룬다. 달라진 외모 덕분이었을까. 아니다. 달라진 마음가짐 때문이었다. 민재희는 그제야 스스로가 원래부터 아름다운 존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재숙은 민재희 역할을 제안받고서 한참을 망설였다. 그는 "우스워질까 봐"라고 답했다. 이유를 물으니 "민재희는 몸집이 크고, 나이가 많은 외형을 지녔다. 나도 그렇다. 같은 서러움을 겪어봤고, 이 세상에는 수많은 민재희가 존재한다. 미디어는 잔인하고, 타인은 냉혹하다"며 "보여지는 것 단 하나로 판단해 독설을 뱉어댄다. 살면서 수도 없이 울었다. 외모가 실력인 연예계에서 살고 있으니 말이다. 나 자신, 작품 속 민재희, 세상의 민재희들이 드라마로 희화되는 꼴을 보기가 싫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하재숙은 쉬이 민재희를 포기하지 못했다. 그는 연기자이기 때문이다. 하재숙은 "나에게는 캐릭터라는 것이 존재한다. 내 외형에 걸맞은 캐릭터를 제안받은 것이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특수분장을 하고, 시련에 서러워 울고, 사랑을 찾아가는 와중 판타지 요소도 담겨있다. 연기자로서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고 전했다.

하재숙은 PD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강조했다. 그는 "PD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여러 가지를 물었다. '작품이 너무나 욕심나지만, 너무 걱정된다. 잘 해낼 자신 있지만, 상처될까 무섭다. 그러니 우스꽝스럽지 않아야 한다. 내가 아니고, 민재희를 우습게 만들지 말아 달라'고 했다"며 "다행히도 PD의 생각과 나의 생각은 같았다. 당시에 이런 행복한 결말을 알려주지는 않았으나, 나를 충분히 안심시켰다. 절대 민재희를 웃음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겠다더라"고 말했다.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지닌 민재희를 연기하게 된 하재숙. 연기함에 있어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그는 "잘못 연기했다간 우리 사회에 또 다른 편견을 만들겠다 싶더라"며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길 수 있어 보였다. 그때마다 PD를 찾아가 재차 말했고, 확답받았다"고 떠올렸다.

하재숙은 "몰입보다는 절제가 힘들었다. 객관적으로 역할을 분석하기도 해야 하는데, 나와 아픔이 닮아 연민이 곁들여져 걱정이었다"며 "외모를 평가하는 잣대로 너무나 많은 것을 무시받더라. 민재희는 야무지고 능력이 많은 인물이었다. 단 하나 살이 쪘다는 이유로 다른 능력이 평가절하된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나도 그랬다. 난 살이 찌는 체질이지만, 온갖 운동을 섭렵했다. 스킨스쿠버 강사로 일할 정도로 운동신경이 좋다. 남들이 '그만 좀 하라'고 할 정도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힌다. 몸집이 커 역할이 제한됐다. 다른 배우는 못하는 것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닥치는 대로 많은 것들을 배웠다"고 말했다.

하재숙은 민재희를 연기할수록 묘한 사명감이 샘솟았다고. 그는 "나뿐만 아니라, 주변에 숨어 살던 수많은 민재희들의 연락을 받았다. 고맙다더라. 극중 민재희가 하필이면 모델을 꿈꿔 살을 빼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위해 나도 살을 뺐다. 그리곤 성공했고, 당차게 살아갔다. 그 모습이 많은 공감을 얻었다"며 "편견에 갇혀서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 아닌, 편견을 깨려 더욱 노력하는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었다. 그렇게 보인 것이 이번 작품을 통해 이룬 가장 중요한 성과"라고 설명했다.

명대사를 물으니, 하재숙은 무릎을 쳤다. 그는 "극중 민재희의 내면을 사랑해준 유일한 남자 서이도(신성록)가 말한다. '너는 굉장히 소중한 사람이야'라고. 민재희는 용기를 얻어 서이도에게 말한다. '나 네 옆에 당당하게 서고 싶어서 열심히 살았어'라고. 이 두줄의 대사가 '퍼퓸'을 관통하는 주제가 아닐까 싶다"고 전했다.


하재숙은 인터뷰 직전 이와 관련한 글을 SNS에 올려 관심을 끌기도 했다. 살쪘으니 게으른 인간이라 예단 말고, 누구보다 바삐 살아가는 중이니 신경 끄라는 것. 타인을 향한 무자비한 독설을 멈추고 '자기 관리'의 기준을 올바르게 정의하는 취지의 장문의 글. 그는 "뚱뚱해서 안 예쁘다고? 애초에 예쁘게 봐줄 생각 없었잖냐"며 통쾌한 한방을 더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하재숙은 "소주 한잔 걸치고서 쓴 글이다. 남녀로 나뉘어 다투고, 취지와 어긋나 가슴 아파 조금은 후회도 했다. 하지만, 어쩌나. 내가 겪은 진짜 있던 설움들이고 이 세상은 정말 그러한 걸"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혹자는 나에게 '당당한 척하더니 왜 살을 뺐냐'고 묻더라. 내가 사랑하는 민재희의 꿈이 하필이면 모델이었고, 내 직업은 하필이면 배우이기 때문에 뺐다. 살을 찌워야 하는 역할이면 더욱 찌웠을 것"이라며 "이전에도 당당하게 스스로를 사랑했고, 지금도 날 사랑한다. 안타까운 건 살을 빼니 내 말을 들어주는 느낌"이라고 토로했다.


하재숙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는 "제발 '퍼퓸' 속 민재희를 보고서라도 외모 하나로 나머지를 평가하지 않기를 바란다. 완벽한 엄마, 훌륭한 주부, 다정한 아빠, 한 사람의 인간으로 저마다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위해 한마디 했다"고 전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대한민국에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것은 기정사실이다. 개중에서 외모에 가장 냉정하다 손꼽히는 연예계, 심지어 더욱 엄격한 심사를 받는 여배우의 큰소리. 이렇게 허심탄회한 '살' 이야기를 들은 적 있던가. 독하게 품은 메시지를 작품으로 전달하고, 역할로 설명하고, 소주 한잔 걸친 후 당당하게 열변을 토해냈다.

그의 행동은 많은 민재희들의 심금을 울렸고, 용기를 복돋왔다. '살' 안 찐 것이 훈장인 마냥 으스대며 함부로 남을 폄하하던 이들에게는 반성의 기회를 줬다. 지긋지긋하게 지적받던 그놈의 '살'을 24kg 감량해 보이고서, '니들 좋으라 뺀 거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부지런하다'니 더욱 그럴싸하게 와 닿는다. 하재숙의 옳은 소리, 박수받아 마땅해 보인다.

[스포츠투데이 이호영 기자 ent@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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