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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싸미' 한글의 가치, 곱씹을수록 거룩하다 [무비뷰]
작성 : 2019년 07월 24일(수) 16:32

나랏말싸미 리뷰 / 사진=영화 나랏말싸미 포스터

[스포츠투데이 한예지 기자] 견고한 정서를 깨고 정서를 자극하는 과감함은 자칫 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영화 '나랏말싸미'의 목적은 통설을 파헤쳐 실제와 허구를 가려내고자 함이 아니다. 위대한 유산, 한글의 가치가 어떻게 지금까지 이어져왔는지를 담아낸다. 곱씹을수록 거룩한 의미를 지닌 영화다.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제작 영화사 두둥)는 역사엔 기록되지 않은 훈민정음 창제를 함께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훈민정음을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공동 창제했다는 정설을 뒤집고, 억불 정책이 극에 달했던 그 시대 신미 스님과 함께 공동 창제했다는 추정을 내세운 것이다.

우선 역사적 기록과 고증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영화를 접할 필요가 있다. '나랏말싸미'는 그동안 기록되지 않은, 그리고 다뤄지지 않은 서사를 새롭게 풀어간다. 그 자체로 흥미롭다.

유교의 나라 조선은 국법으로 불교를 억압했다. 이같은 억불 정책으로 '개' 취급을 당하던 신미 스님(박해일)과 세종(송강호)이 협업해 새 문자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묘한 설정인가. 여기에 세종과 신미보다 더 큰 도량으로 앞장서 혜안과 강단으로 길을 터가며 한글 창제의 당당한 주역으로 그려진 소헌왕후(전미선)까지, 화룡정점이다. 영화는 이 세 인물들의 알려지지 않은, 익숙하지 않은 이면을 생생하고 섬세하게 풀이해간다.

세종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백성들에게 나눠 주고 싶었다. 이를 위해 가장 쉬운 문자를 만들고자 했고, 모든 백성이 문자를 읽고 쓰는 나라를 꿈꿨다. 민족의 주체성을 바로잡고 주체적이며 독립적인 나라로 세우기 위한 세종의 애민정신과 신념은 한결같다. 하지만 사대주의의 극치를 보이며 망상이라 치부하는 학자들, 극렬히 반대하며 성토하는 기득권 세력들의 행태에 짓눌린다. '나랏말싸미'는 이같은 상황에 놓여 정신적 아픔과 괴로움에 시달리던 세종의 이면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위대한 성군, 힘 있는 왕으로서의 모습이 아닌 제게 등 돌리고 질타하는 신하들로 인해 좌절하고 고뇌하는 '평범하고 가엾은 인간' 세종의 모습은 안타까운 연민을 자아낸다.

그런 세종의 가장 든든한 안식처이자, 지혜로운 조력자로 소헌왕후(故전미선)의 존재를 부각한 점도 이색적이다. 소헌왕후는 세자가 아니었던 어린 이도에게 임금이 되어야 한다고 권했던 현명한 배우자이며, 그 순간부터 줄곧 세종의 뜻과 길을 곁에서 지키며 지지하는 이로 묘사된다. 무엇보다 그의 존재로 인해 한글 창제가 시작되고 끝을 맺기도 한다. 그동안 숱한 사극에서 전혀 접하지 못한 이토록 현명하고 주체적인 궁중 여성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색다르고 놀랍다. 특히 술을 마시기 위해 제 눈치를 살피는 세종과 아들들을 눈빛으로 꾸짖고, 외롭고 힘겨워하는 남편의 등을 손수 씻겨주며 건네는 위로와 믿음 등은 따스하고 다정한 온기를 지니며 극 전체를 품는다. 아내에게 눙을 치는 왕과 잔소리하는 왕비의 애정과 신뢰가 묻어나는 장면들은 실로 어색하면서도 그리 정겹다.

그리고 신미는 '꼴통'이라 표현될 만큼 영화적으로도 가장 에너지 넘치고 흥미롭게 표현된 인물이다. 불경에 능통한 고승이자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을 지키는 신미는 첫 등장부터 강렬하다. 팔만대장경을 내어달라 진을 치는 일본 사신들에 "대장경판의 주인은 임금도 신하도 중도 아니고 이 땅의 백성들이다. 중국, 티베트, 거란, 고려 모두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이 직접 만들었다. 너희도 너희 손으로 만들어라. 밥은 빌어먹어도 진리는 빌어먹을 수 없다"는 범어로 내쫓는다. 그리고 그의 대사에 곧 '나랏말싸미'를 관통하는 답이 있다. 신미는 '문자는 진리를 담는 그릇이며 나라의 말은 백성의 것이어야 한다'는 근원을 갖고, 가장 쉽고 아름다운 문자를 만드는데 뜻을 함께 한다.

나랏말싸미 리뷰 / 사진=영화 나랏말싸미 스틸


'나랏말싸미'는 유기적으로 얽힌 세 인물의 개연성을 중심으로 내세워 새로운 서사를 써내려간다. 사건의 극적 요소는 크지 않아 이야기는 다소 밋밋하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자극적인 사건 중심 서사를 배제하고 기품있게 인물의 내외적 갈등을 그리며 심리적인 접근을 하는 지점은 인간에 대한 섬세한 감독의 통찰을 엿보게 한다. 그렇기에 화려하고 원색적인 기존 사극의 색채보다 인물이 더욱 부각될 수 있게 색을 덜어내고, 사실감 넘치는 실제 풍경과 배경들로 공간감을 살린다.

한글 창제 과정만큼 중요한 건 전파의 과정이다. 점-선-면에서 천문학과 소리글자를 활용해 완성되는 우수하고 아름다운 글자의 원리와 과정을 심도 깊게 다룬다. 이어 이것이 '암글'이라는 멸시와 수모를 겪어 사라질 위기에 처할때 여인들의 힘으로 널리 퍼져나가며 근원적 가치를 되새기는 흐름은 위대하고 경이롭다.

결국 '나랏말싸미'는 민족의 운명을 바꾼 위대한 한글의 가치를 되새기며, 이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왕 개인의 업적이 아닌 계급과 종교 그리고 성별을 뛰어넘은 모두의 힘으로 완성된 성취였음을 말한다. 체면과 탐욕에 백성의 권리를 빼앗고 막는 기득권 세력이 아닌, 애민정신에 기초한 성군의 신념이 백성을 감화시키고 비로소 백성이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 바로 이 훈민정음 정신을 말하고자 한다. 이는 현시대 사회 현상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그렇기에 대중이 가장 사랑하는 왕 세종의 한글 창제 통설을 영화적 소재로 삼는 민감함과 위험을 감수하고 새로운 허구와 상상을 펼친 것이다. '한글'을 매개로 깊은 공감과 정서의 울림을 자아내며 당대부터 현시대를 관통하는 '나랏말싸미'의 가치는 유의미하다.

16년 만에 다시 만난 송강호-박해일-故전미선의 조화, 그것만으로도 어떤 희열마저 솟아난다. 그러면서도 아름답고 애달프다. 7월 24일 개봉.

나랏말싸미 리뷰 / 사진=영화 나랏말싸미 포스터



[스포츠투데이 한예지 기자 ent@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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