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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봉준호 감독, 기어코 완성한 마스터피스 [인터뷰]
작성 : 2019년 05월 31일(금) 06:36

봉준호 감독 인터뷰 /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스포츠투데이 한예지 기자] 겉보기엔 수더분한 동네 아저씨 같건만, 날카로운 통찰력과 집요한 상상력으로 기어코 대단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태블릿 PC 속 빼곡한 메모들에는 그가 그린 견고한 세계 속 세세한 설정과 그림들 수십수백 장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대단한 재능을 갖고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천재를 지켜보는 범재의 경이로움은 이런 걸까. 짜릿하고 순수한 감탄과 동경, 이는 온전히 봉준호 감독을 향한 것이었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타이틀인가. 그것도 한국영화 100주년이란 기념적인 순간에 남긴 족적이다. 영화 '기생충'은 여전하고 확실하게 봉준호다운 영화이면서, 완벽하고 성숙하게 진화한 봉준호만의 세계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감히 상상할 수 없던 스토리, 기막힌 상상력. 그럼에도 보편적인 이야기로 사회적 현상과 환경을 직시해 고착화된 계급과 계층의 절대적 분리, 자본주의 사회의 절망과 공포를 그려냈다. 정녕 소름 끼치도록 경이롭단 찬사가 아깝지 않다. 흥분감이 들끓는 와중에도 정작 봉준호 감독은 큰 감정 기복 없이 온화하고 태평스럽다. 작품 얘기보단 다른 얘기를 하고 싶다며 축구, 야구 얘기에 한창 열을 올리다가 '기생충'의 시발점이 된 장면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제 방대한 세계관과 치밀한 아이디어가 고스란히 담긴 태블릿 PC를 스스럼없이 꺼내들고 뒤적이는, 그런 격의 없고 천진난만한 사람이다.

관광버스가 흔들릴 정도로 춤을 추던 아주머니들을 보고 '마더'가 나왔고, 한강에 떨어지는 검은 물체를 보고 '괴물'을 만들었단 봉준호 감독. 그는 수십 년 동안 간직한 이미지들을 살면서 제가 접한 뉴스와 새로운 이미지들과 새롭게 결합하며 작품으로 만들어내곤 했다. 그 창의적이고 독특한 작업방식과 '기생충'의 시작은 조금 달랐다. 부와 권력에 따라 서열화된 시대의 계급 문제를 다룬 영화 '설국열차' 후반 작업 중이던 2013년. '설국열차'도 계층을 다룬 얘기지만 장르는 SF였다. 봉준호 감독은 이를 좀 더 현실적으로 그려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기생충' 출발 단계는 그냥 같은 인원 수의 두 가족이 있다는 설정이었다. 오히려 작업 중간에 머릿속을 사로잡은 이미지가 떠올랐단다. 그가 보여준 이미지는 손수 스케치한 영화 속 한 장면이었다. 극 중 배우 이정은이 아주 괴기하고 힘겨운 포즈로 계층의 실체를 드러내는 동작. 수준급 그림 실력에도 "그냥 그렸다. 가장 기괴한 순간이잖나"라며 웃어 보인 봉준호 감독이다. 그러고 보니 대학 시절 교내신문에 4컷 만화와 시사만평을 연재하기도 했던 그다. "군대 다녀와서 복학하고 92년도 2학기 때인가, 돈 받고 그림을 그렸으니 만화가 생활을 잠깐 한 거다. 그림 잘 그렸다고, 완성도가 높다고 학내 화제를 몰았더랬지"하고 익살을 떨지만, 실제 그는 자신의 작품들 스토리보드를 직접 그리기로 유명하다. 특히 이번 '기생충'은 백프로 그가 그렸다. 얼핏 공개한 메모 속에도 소품 하나하나까지 디테일한 설정을 새겨 그려 넣을 만큼 세밀했다. 이번 시나리오와 스토리보드 출간을 결정했다고 하니 기대해볼 만하다.

극 중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두 가족의 집을 그려놓은 메모는 특히 눈길을 끈다. 특히 우아하고 고상하지만 계층의 분리가 가장 명확히 드러나는 박사장네 집. 봉준호 감독은 제 그림 메모 속 구조를 미술 감독에 똑같이 구현해달라고 요구했단다. 그는 "그 집이 전부 세트였다. 건축가랑도 상의를 해봤는데 제가 요구한 동선과 구조를 보여줬더니 '건축가는 절대 이렇게 집 안 짓는다. 이런 건축은 없다'라고 하더라"며 껄껄 웃었다. 하지만 그대로 구현이 안 되면 스토리가 전개될 수 없었다. 그가 원한 건 미로 같은 공간이었다. "미로 같다는 것이 꼭 그 안에서 길을 잃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스토리 구조 자체가 엿보고 엿듣고 한쪽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다른 쪽에선 전혀 모른다. 집의 구조가 곧 인물의 동선이라 시나리오 끝났을 때 머릿속에서 디자인이 그려졌고 그대로 주문했던 것"이라는 설명이다.

사진=영화 기생충 스틸


가난한 동네. 부잣집. 이 공간의 대비는 두 가족의 사회적 위치를 대변하며, 사회의 수직 구조에 대한 메타포를 내포한다. 그렇기에 콘트라스트가 제대로 살지 않으면 설득을 줄 수 없단 생각에 미술 비용에 제작비를 아낌없이 넣었단다. 특히 박사장네 집 가구들은 렌트를 했는데 임대료도 비싸더란다.(테이블 한 개에 5천만 원이라니.) 촬영장비 올릴 때마다 모포로 덮고 가구들을 애지중지 했다며 혀를 내두른 감독이다. 하지만 그동안 한강의 매점, 지저분한 약재상, 산골집 등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해서 이토록 고급스러운 공간은 처음 구현된 것이라 그 자체로도 흥미롭다. 이에 봉준호 감독은 "이젠 좀 다뤄보려고 한다. 홍경표 촬영감독이 '우리 부잣집은 처음 찍는다'고 놀라워했다. 그렇게 낯선가"하고 웃어 보였다.

정작 낯설었던 건 이전까지 거대 시스템과 맞붙고 억압당하는 소시민들의 편에서 그들을 향해 따스하며 구수한 시선을 보내던 봉준호 감독이 너무도 냉담하고 객관적인 거리를 두는 것이다. 이는 암울하고 낙망적인 현실을 직시케 하고, 그탓에 시종일관 온갖 유머와 익살을 녹여냈음에도 절망과 비관적 카타르시스에 도달하게 된다.

이를테면 뻔뻔하기 짝이 없던 빈곤 가족이 오르지 못할 계층 앞에서 무력하고 부질없이 무너지는 모습. 이는 이전까지 야유와 불쾌감을 자아낸 그들의 행위에 가엾은 연민과 서글픈 연대를 이끌어낸다. 이에 봉준호 감독은 "하는 짓이 워낙 구수하고 애교스러워서 표면적으로 설득되지 않나. 또 논리적으로 엄밀히 따지면 영화 속에서 너무나 큰 데미지, 혹독한 퍼니시먼트(punishment)를 받는다"고 설명했다. 악한 의도는 없었겠으나 너무나 다른 삶의 궤도와 일상적 가치관으로 빈곤한 자들의 모멸과 수치를 유발하는 부유층의 모습도 맥락은 같다. "우악스럽고 무식하고 탐욕적인 부자의 모습은 피하고 싶었다. 조금 치사하고 미묘한 갑질, 갑질이라 하기에도 뭐한 그냥 개념이 다른 느낌을 담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다들 적당히 착하고 악하고 사랑스럽고 혐오스럽다. 그렇기에 특정한 인물에 몰입할 수도 거리를 둘 수도 없는 난감하고 낯선 감정이 충돌한다. 봉준호 감독은 사실 감정을 끌어내는 간편한 방법은 많단다. 하지만 이는 쉽게 휘발된다. 그래서 복합적이고 사실적인 느낌을 더 살리려 했다.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그래서 누가 좋은 놈이야? 나쁜 놈이야?"라는 구분 없이, 오히려 이 구분이 쉽지 않은 상태에서 어떠한 감정에 도달했다면 그 형태의 먹먹한 감정이 더 파괴력이 있다고 생각했단다. 여기엔 배우들의 힘이 크다며 공을 돌린다.

빈곤한 자들과 부유한 자들의 절대적인 간극, 영원한 계층 사회의 폐풍 속 추락한 인간의 존엄.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으로 그의 20년 영화사를 아우르며 방점을 찍었다. 쏟아지는 전세계의 극찬에 멋쩍어하면서도 "마침내 스스로 장르가 되었다는 말이 과분하지만 기뻤다. 제 영화 인생에선 정말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기생충'은 상의 이름으로 규정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그의 바람에는 작품을 향한 애정과 견고한 프라이드가 엿보였다. 세계적인 천재 감독 이전에 천생 예술가인 봉준호 감독이었다.

봉준호 감독 인터뷰 /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스포츠투데이 한예지 기자 ent@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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