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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차왕 엄복동' 정지훈의 단단함 [인터뷰]
작성 : 2019년 02월 23일(토) 11:00

자전차왕 엄복동 정지훈 인터뷰 / 사진=레인컴퍼니 제공

[스포츠투데이 한예지 기자] 정지훈은 꼿꼿하면서도 유연하다. 과거의 고통을 꾹꾹 눌러 담고 조금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그가 걸은 곳은 어느덧 길이 돼 있었다.

정지훈이 오랜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왔다. 배우 이범수가 제작자로 나선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감독 김유성·제작 셀트리온엔터테인먼트)에서 희망을 잃은 일제강점기, 일본 선수들을 제치고 조선인 최초로 전조선자전차대회 1위를 차지하며 동아시아 전역을 제패한 엄복동이 됐다.

어느 날 이범수는 정지훈의 회사까지 찾아와 좋은 시나리오가 있다며 읽어보라 권했다. 정지훈은 '자전차왕 엄복동'이란 제목만 들었을 땐 '피구왕 통키'같은 느낌이 났단다. 픽션인 줄 알았는데 실존인물이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본군들이 엄복동을 제압하려 하자 국민들이 달려 나와서 "엄복동을 지킵시다" 하며 인간 방어벽을 만드는 모습이 너무 극적이란 생각을 했는데 이 또한 실화였다. 당시 이런 일이 있었다니, 엄복동이 처해진 시대와 그의 존재가 매우 슬프고 억울하고 화려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마음이 동해 엄복동이 되기로 결심한 그였다.

자전차 경주 장면이 주된 신이기에 쉼 없이 자전차를 타야 했던 만큼 육체적으로 상당히 고달픈 촬영이었을 테다. 두 바퀴 달린 것은 이제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너스레인 정지훈은 "고난도 테크니컬이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선수용 자전거는 브레이크가 없어 힘들었다"며 "페달을 밟다가 멈추고 싶어도 계속 돌려야 한다. 멈추려면 발로 짚어 멈추던가 스스로 넘어져야 했다"고 털어놨다. 500미터 트랙을 하루에 수백 바퀴를 돌았고, 이런 과정을 반년이나 거듭했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았을 정도라니 질릴만도 했다.

하지만 박진감 넘치는 자전차 경주 신의 완성본은 지난 피로와 고된 기억을 잊게 했다. 자전거 경기가 이렇게 긴장감 넘칠 줄은, 그 또한 촬영하면서까지 긴가민가했던 부분이다. "자전차 경주 신은 타이밍 싸움이었다. 중간에 멈추질 못하기에 다시 찍으려면 무조건 트랙을 돌고 와야 했다. 선수들, CG팀, 스포츠팀, 카메라팀 등이 타이밍과 호흡을 정확하게 맞추는 것이 정말 힘든 작업이었다"는 그는 "완성된 경기장 신을 보며 정말 훌륭하단 생각을 했다"며 만족감을 표했다.

실제 엄복동이 그 시절 가져다준 승리는 민족의 울분을 풀어주고 자긍심을 회복시킨데 의의가 있지만, 영화는 이같은 활약으로 말미암아 3.1 운동의 근간이 되는 민족의 항거를 이끌어낸 위인으로 엄복동을 묘사하는 우를 범했다. 엄복동의 말로 또한 '자전거 도둑'이란 불명예가 씌워진 초라하고 불편한 것이었다. 정지훈 또한 이를 인정하며 "엄복동은 스포츠 영웅일 뿐, 위인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했다.

다만 그는 궁금증이 생겼다.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자전거를 훔쳤을까? 애국단을 돕기 위해 그랬을까? 정말 자전거를 타고 싶어 그랬을까?" 따위의 호기심과 의문이다. 이는 엄복동이 지닌 신념은 무엇일지로 이어졌다. 자전거가 좋아서 탔을 뿐인데 국민들이 따라온 것인지, 애국심 때문에 더 잘 타려 했을지, 경기장에서 일장기를 부러뜨린 게 승부욕 때문인지 애국심 때문인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결론은 관객의 몫이었다. 다만 캐릭터를 설정하는 건 온전히 그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정지훈은 거듭된 고민 끝에 너무도 순박하고 무식하게 자전거만 좋아하는, 어떠한 욕망이나 나쁜 의도가 없는 엄복동을 완성했다.

정지훈 / 사진=영화 자전차왕 엄복동 스틸


초반 시커먼 얼굴에 수더분한 차림, 헤헤 웃으며 물지게를 나르는 그의 모습은 완벽히 제가 만든 엄복동에 녹아든 모습이었다. 그는 "엄복동이 물지게를 지면 어떨까 싶었다. 지게를 지면 뒤뚱뒤뚱 걷지 않나. 집에 와서 물바가지 떠서 고무신 벗어 발에 뿌리고, 크게 떠서 마시고. 그런 모습들이 다 아버지의 모습이었다"며 "어렸을 때 땔감이 필요해 아버지가 지게를 매고 땔감을 해오시던 모습, 아버지의 걸음걸이, 땀을 닦고 다닌 모습 등을 녹여냈다"고 털어놨다.

시대극이 처음인 그가 이번 영화를 통해 암울했던 시기를 살았던 이들의 고통과 울분을 간접 체화한 것도 많은 감상이 들게 했다. "그 시절을 떠올려보면 너무 억울하고 슬펐을 것 같더라. 너무 힘든 시절이었을 것 같다. 전 배고픈 고통이 뭔지 안다. 되게 배고픈데 먹을 게 없으면 정말 불행한 거다. 그 시절은 여러 가지로 배고픈 시절이었다. 지금을 살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는 그다. 실제 정지훈은 자수성가 노력형 스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힘들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지나 지금의 스타가 되기까지 그가 거쳐왔던 모진 풍파는 이미 익히 알려진 바 있다.

"실패는 누구나 하고, 절망도 누구에게나 온다. 꼭 신은 버틸 수 있을 정도까지 시련을 주시더라. 과거엔 '나한테 왜 이러지. 도대체 왜. 죽으라는 거야. 어떻게 하란 거야'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엄마는 병드셔서 병원에 있고, 동생에겐 챙겨줄 밥이 없고, 아버지는 일하신다는데 연락은 없었다. 죽으란 거구나 싶었다. 그때 오디션도 스무 번이나 탈락한 제게 진영 형을 만나게 해 줬다. 박진영 형은 저 같은 사람을 찾았다고 했다. 제가 뭐라고." 과거를 회상하며 잠시 애잔한 미소를 지은 그는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면 스타가 안 되어도, 어머님만 살아계셨으면 좋겠다. 굉장히 보고 싶다. 사랑한단 말을 하지 못한 것이 평생 뼈에 사무친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이같은 기억과 후회는 지금의 정지훈을 만들었다. 그는 더욱 단단해졌고 여유로웠다.

자전차왕 엄복동 정지훈 인터뷰 / 사진=레인컴퍼니 제공


그는 이번 영화를 두고 '국뽕'과 '애국주의 마케팅' 아니냐며 거부감을 갖는 일부 시선에 대해서도 솔직했다. "저는 앨범을 내거나 드라마나 영화를 할 때 잘한 건 칭찬받고 못한 건 혼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가는 관객들이 해주시는 것"이라며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준비가 됐단다. 다만, 어디까지가 애국심이고 '국뽕'인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했다. 민중들이 엄복동에 총부리를 겨눈 일본에 맞서 저항하고, 엄복동을 지켜야 한다고 외쳤던 것은 사실이다. 극화시킨 미담, 혹은 애국주의에 고취된 클라이맥스가 아니다. 영화는 이런 항거 정신이 비단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자 한 것이라고. 정지훈은 "저는 최선을 다했고 떳떳하다. 영화적 장치를 통해 과하게 거품을 넣으려고 했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몰랐던 엄복동이란 세 글자만 알게 돼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과거의 고통에 얽매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자양분 삼아 더 나은 자신이 되어가는 중이다. "어렸을 때 많이 다쳤기에 지금 스크래치가 난다 해도 두렵지 않고, 이것 하나로 버티는 것 같다. 그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하면서도 사람들이 이젠 제 과거 얘길 하도 많이 들어 지겨워하실 것 같다며 쑥스러워 웃어 보인다. 지금은 가수로, 배우로, 그리고 프로듀서이자 제작자로 살며 도전하는 것이 즐겁다는 그다. 자신이 걸어온 곳을 길로 만들며 여전히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는 정지훈이다.

자전차왕 엄복동 정지훈 인터뷰 / 사진=레인컴퍼니 제공



[스포츠투데이 한예지 기자 ent@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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