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이소연 기자] 영화 '말모이'(감독 엄유나·제작 더 램프)는 엄유나 감독의 입봉작이다. 그는 "아직은 신인 감독일 뿐"이라면서 고개를 숙이면서도 갓 데뷔한 감독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게 평온하고 여유 있어 보였다.
어쩌면 오랜 경험에서 축적된 내공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의 필모그래피만 봐도 뚝심을 엿볼 수 있다. 2017년 천만 영화에 등극한 '택시운전사' 시나리오로 득명한 엄유나 감독. 하지만 그는 '국경의 남쪽'(2006) 촬영 현장부터 시작해 10년 넘게 영화 현장에 있었고 '택시운전사'는 처음으로 상업 영화화된 그의 작품이었다.
"'택시운전사’가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죠. 처음엔 (흥행이) 실감 안 나다가 나중에 받아들이게 됐어요. 진짜 기적 같은 일이었어요. 덕분에 '말모이'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엄유나 감독은 '택시운전사'에 이어 시대극 '말모이'를 집필은 물론 연출까지 맡게 됐다. '말모이 작전' 다큐멘터리를 본 뒤 영화 '말모이'를 구상하게 됐다고.
엄 감독은 "조선어학회가 사전을 만든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다큐멘터리를 보고 지식인들 뿐 아니라 지방까지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이 동참했던 게 감동적이었다. 그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해봤다. 그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고 했다.
엄유나 감독은 평범하지만 귀하고 값진 마음을 가진 사람이 영화의 주인공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말모이'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주인공 판수의 마음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사람으로 감독은 배우 유해진을 유일무이하게 떠올렸다.
엄유나 감독은 "평범해 보이지만, 귀하고 값진 배우로 유해진 선배님이 생각났다. 판수라는 인물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변화 폭이 큰 인물인데 그만큼의 깊이를 담아낼 수 있는 배우라고 생각했다. 제목이 '말모이'니까 말이 중요한데 우리말이 재미있고 맛깔스럽지 않나. 우리말의 재미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배우가 아닐까 싶었다. 여러 가지를 놓고 고민했을 때 유해진 선배님 말고는 없었다"고 극찬했다.
두 사람은 2006년 개봉한 영화 '국경의 남쪽' 촬영 현장에서 배우와 스태프로 인연을 맺었다. 엄유나 감독은 '친분'이라는 단어에 민망하고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유해진 선배님은 얼마나 많은 연출부를 만나셨겠냐. 친분이 있었다기 보단, 이번에 영화 촬영을 하며 선배님에게 의지를 많이 했던 건 사실이었다. 신인 감독이라고 배려도 많이 해주셨다. 본인은 치열하게 고민하시는데 주변 사람들은 편안하게 해주시는 힘이 있지 않나. 유해진이라는 배우, 그리고 사람이 갖고 있는 힘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정말 도움을 받은 것 같다"고 돌이켰다.
영화 '말모이' 스틸 / 사진=롯데 엔터테인먼트 제공
그가 올곧고 반듯한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 역으로 배우 윤계상을 선택한 이유도 궁금했다.
엄유나 감독은 "(윤계상이) '범죄도시' 속 장첸 이미지가 아주 강렬했지만 저는 윤계상이라는 배우가 배우로서 걸어왔던 길을 생각했다. 정말 다양한 역할을 하셨더라. 드라마, 영화 가리지 않았다. 지식인 역, 건달 같은 역할도 하셨고, 백수도 연기하셨더라. 연기자로서의 노력과 의지가 류정환으로 느껴졌다. 사전을 만들기 위해 어려운 길을 걸어가는 인물 류정환과 겹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이어 그는 "류정환이라는 역할이 쉽지 않았을 거다.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대표라는 직책이 지금의 저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들 만큼 책임감과 무게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 직함 뒤에 류정환이라는 인물이 안 보일 수도 있다. 반면에 류정환은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뜨거움이 들끓고 있지만 책임감과 무게 때문에 드러낼 수는 없고 그 뜨거움을 관객들에게 전달해야 하니 정말 어려운 역할이었다고 생각했다. 현장에서 윤계상 씨 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어렵거나 힘든 게 있으면 본인의 모습을 같이 고민해보자고 했다"고 말했다. 배우에 대한 감독의 신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말모이'가 그의 첫 연출작이고 이전까지 그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다. 하지만 엄 감독의 꿈은 시나리오 작가보다 감독이었다고. 엄유나 감독은 "영화를 전공하고 연출부 스태프로 일한 게 다 감독이 되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시나리오를 오래 쓰고 감독은 처음 해보니 연출은 많이 다르더라"고 돌이켰다.
그는 "시나리오는 노트북 앞에서 혼자 작업하지 않냐. 물론 다른 사람들과 의견도 주고받지만 완성하기까지 저 혼자 결정해야 하는 부분이 많다. 영화는,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해서 서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고, 현장에서 함께 만드는 점이 매력적이었다"고 했다.
그만큼 그가 중심을 지키면서도 소통에 능한 감독이라는 말이 와닿았다. 엄유나 감독의 소신은 영화는 현장에서 같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거다. 엄 감독은 "사람들이 보이는, 사람들이 빛날 수 있는 방향이라면 무엇이든 좋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배우분들과 의견을 많이 나눴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시나리오보다 훨씬 좋아진 경우가 많았다"고 돌이켰다.
자칫 '우리말'에 대한 소중함을 전하는 이야기가 심심하게 전달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엄 감독은 걱정하지 않았다고. 그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 말과 글을 소재로 하고 있고, 특히나 일제강점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그런 요소가 있을 수 있지만 제게 우선은 사람이었다. 그 시대, 우리 말을 모은 사람들,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고 소신을 밝혔다.
"'말모이'는 사람 냄새나는 따뜻한 영화예요. 추운 겨울에 온 가족이 같이 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현장에서 저희끼리는 마음을 다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정말 온 마음을 다해서 만들었고, 그 마음들이 온기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해요. 그 온기가 전달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인터뷰 하면서 그가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건 촬영 과정에서건 사람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는 감독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택시운전사'의 뭉클함처럼 아마 '말모이'에서도 많은 관객에게 감동을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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