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이소연 기자] 영화 '왕의 남자'(2005) 속 육갑, '타짜'(2006) 속 고광렬 역 등 '명품 조연'으로 존재감을 발휘한 유해진. 그는 코미디 영화 '럭키'(2016) 이후 흥행성 있는 주연 배우로 우뚝 섰다. 하지만 그는 "집에 있는 남우조연상이 최고로 좋다"고 할 정도로 소탈하고 인간미 넘치는 배우였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말모이'(감독 엄유나·제작 더 램프)는 1929년 우리말과 글을 금지했던 일제 강점기 조선의 학자들과 국민이 조선의 '말'을 비밀리에 모았던 '말모이 작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말모이'에서 유해진은 감옥을 밥 먹듯 드나들다 우연한 계기로 조선어학회 사환이 되는 판수를 연기했다.
유해진은 "
우리말, 글, 정신을 지키려 했던 모습에 끌렸던 것 같다. 영화 대사에도 있지만 말이 곧 정신 아닌가. 정신을 지키려고 했던 (선조들의) 희생이 신선했다"고 말했다. 시나리오를 읽으며 그가 느낀 뭉클함이 '말모이'를 택하게 된 이유라고.
유해진은 판수 캐릭터를 완성하면서 그가 초등학생 때부터 봤던 동네 아저씨의 강렬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유해진은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 근처에 목공소에서 일하시던 아저씨가 계셨다. 툭하면 길가에 침을 뱉고, 항상 세상에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20대까지 그분을 가끔 뵀다"고 돌이켰다. 유해진이 서울로 상경한 뒤부터는 그 사람을 볼 수 없었다고. 하지만 언젠가 연기할 때 캐릭터화 하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단다.
그렇게 유해진은 목공소 아저씨에 영감을 받아 판수의 거칠고 불량한 외양을 완성했다. 하지만 판수의 본성은 악하지 않은 인물. 자식에 대한 부성애만은 끔찍하다.
인간 유해진과 판수의 공통점도 있다. 유해진은 "판수 만큼은 아니더라도 표현을 잘 하지 못 하는 점이 판수와 닮은 것 같다. 나도 속에 많은 것을 담고 겉으로는 친절하게 표현하지 못 하는 편이다"고 말했다. 판수는 엄유나 감독이 애당초부터 유해진을 염두에 두고 탄생시킨 캐릭터다.
사실 '말모이'를 연출한 엄유나 감독과 유해진의 인연은 매우 오래됐다. 그가 2006년 영화 '국경의 남쪽'에 출연했을 당시 엄유나 감독은 연출부에 스태프로 있었다고. 유해진은 "그때 뵀던 분이 지금까지 현장에 있다는 게 너무 놀라웠다. 배우든 스태프든 영화 현장에서 계속 있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택시운전사'를 쓰셨다는 걸 듣고 놀랐는데 이 작품 연출을 하신다고 하니 더 놀라웠다"고 털어놨다.
'말모이'는 엄유나 감독의 입봉작. 유해진은 "감독님이 뚝심이 있어서 너무 좋았다. 그러면서도 귀가 열려있다. 현장에서 여러가지 선택지를 놓고 판단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공부가 잘 돼 있는 분이셨다"고 말했다. 감독과 소통하며 만들어나가는 영화 현장이었기에 작업이 후반부로 갈수록 더 재미있었단다.
하지만 '말모이'는 초반의 웃음부터 후반부의 감동까지 유해진이 앞장서서 끌고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미만큼이나 부담도 컸다. 개봉을 앞두고 속병까지 났다는 그다.
유해진은 "어느 순간부터 점점 작품에서 연기할 때 마음이 무거워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완벽한 타인' 때는 7명의 배우가 균등하게 나오니까 마음이 편했는데"라고 운을 뗐다.
유해진은 "많은 사람들이 한 작품에 참여하지 않냐. 다들 작업하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껴야 하니 과정도 중요하지만 대중 영화이니 결과에서도 대중이 등 돌리면 그것만큼 상처 받는 것도 없지 않나"면서 "두렵기도 하다. 그래서 현장에서 후회하지 않으려고, 한번 찍으면 못 주워 담으니까 더 노력하는 것 같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1997년 영화 '블랙잭'으로 데뷔한 그는 오랜 무명 시절을 견디고 현재 충무로에서 다작 배우로 활약 중이다. 유해진은 그 이유에 대해 "시나리오가 끌리면 출연한다. 하지만 아무리 이야기가 재미있어도 나와 어울리지 않는 건 피하려 한다. 그게 아마 오래 일하고 있는 비결인 것 같다"고 겸손히 말했다.
유해진만의 차별점 중 하나는 관객에게 감동과 웃음을 동시에 준다는 것이다. 코미디 연기를 잘하는 배우이면서도 가능한 연기의 폭이 넓다. 유해진은 "코미디 연기라고 해서 코미디스럽게 안 하려고 한다. 코미디와 그렇지 않은 연기로 스스로 나누지 않는다. 전 다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과한 연기를 하더라도 목적이 있을 때만 그렇게 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이제는 충무로의 대세가 된 유해진은 올해 '레슬러', '완벽한 타인'을 개봉시켰고 '말모이' 상영을 코 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남우주연상을 받아보지 못했다.
"집에 남우조연상 트로피가 꽤 많이 있어요. 세 보진 않았지만 10개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 상이 최고로 좋아요. 그 상으로 (욕심이) 채워진 것 같아요."
큰 욕심 없이 주어진 배역에 최선을 다하는 그의 배우로서 인생관이 엿보이는 말이었다.
이소연 기자 ent@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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