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한예지 기자] 말을 요령 있게 하거나 이리저리 잘 둘러대는 재주는 좀처럼 없다. 대신 영상으로 풀어낸 그의 작법은 남다른 기교가 넘쳐 많은 이들을 흥미롭게 한다. 김병우 감독이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고층빌딩 생방송 라디오 부스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테러범과의 치열한 공방전을 그린 전작 '더 테러 라이브'로 각종 영화제를 휩쓸며 참신한 연출력을 인정받은 괴물 신인 김병우 감독은 5년 만에 차기작 'PMC: 더 벙커'(제작 퍼펙트스톰필름)로 입지 강화에 나섰다. 영화는 글로벌 군사기업의 캡틴 에이헵(하정우)이 CIA로부터 거액의 프로젝트를 의뢰받아 지하 30m 비밀 벙커에 투입됐지만, 그곳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닥뜨리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 생존 액션극이다.
이쯤 되면 '고립 액션'은 김병우 감독의 취향인 듯하다. 이에 멋쩍게 웃어 보인 그는 "다른 감독님들도 대부분 비슷하겠지만 자신이 보고 싶은 걸 만드는 것 같다. 일부러 남들이 안 하는 걸 해봐야겠단 생각보단 '이게 더 재밌지 않을까' 하는 접근으로 신선하게 만들려다 보니 이런 기획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영화는 마치 게임 화면 속에 놓인 듯 감각적인 연출이 돋보인다. POV(1인칭 앵글) 캠 카메라와 드론 카메라 장비로 공간을 활용한 다양한 앵글이 등장하고, 이는 관객이 영화를 관람하며 동시에 벙커 한가운데 투입돼 인물의 감정과 액션에 직접 관여하는 듯한 체험감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감독은 "게임에선 직접 컨트롤을 하며 몰입감이 들지만, 영화는 자칫 잘못하면 선을 엇나갈 수 있었다. 이런 장면을 어떻게 적재적소에 사용할까 고민했다"고 털어놨다.
이번 영화는 특히 '인물에 대한 추종'이 관건이었다는 감독이다. 그 의미에 대해 감독은 "주인공이 가는 곳에 관객이 함께 가는 느낌이 들길 바랐다. 마치 동행 취재를 하듯 면면을 보여주며 인물의 내적 갈등에 공감하게 하고, 마지막엔 이 사람의 선택을 같이 응원하고 지지할 수 있다면 이 영화를 재밌게 보실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라고 귀띔했다.
실제 김병우 감독은 사건 중심의 전작과는 달리 'PMC: 더 벙커'에서 주인공의 인간적 고뇌와 심리적 갈등을 심도 있게 파고들었다. 한국군 출신의 불법체류자이자 민간군사기업 블랙리저드의 리더 에이헵은 적당히 비열하고 냉철하다. 신체적 핸디캡도 있고 이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매 순간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당하지만, 인간 본연의 마음을 놓치지 않으려 고뇌하고 갈등하는 인물이다. "지난 영화에서의 실축이나 실수 등을 많이 고민했다"는 감독이 쓴 오답 노트에는 인물에 대한 깊이가 부족했단 자평을 했고, 그렇기에 인물의 내면에 더 집중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사실 극의 등장인물들은 모조리 다 에이햅을 흔들기 위해 존재했다고 밝혔다. 극의 인물이나 사건은 모두 주인공을 자극하며 괴롭게 하고 내적 갈등을 위해 존재했다. 그렇게 해서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주제는 생존과 공생의 의미였다.
그는 "극 중 로건이 마트 앞에서 부랑자 모녀가 총에 맞아 쓰러질 때 아무도 안 구해줬다는 대사를 한다. 그의 입장에선 그 모습이 전쟁이라고 생각한 거다. 세상이 썩어들어가고 도덕성이 타락해가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구한단 행위는 더욱 어려워지고 쉽지 않은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기에 각자도생을 외치고 타깃을 사냥감이라 부르던 에이헵이 인간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는 의미가 담긴 클라이맥스 신은 뭉클한 전율과 후련한 해방감을 준다.
김병우 감독은 이에 대해 "자신의 상황과 선택을 계속 합리화하며 스스로를 각인시킨 사람이 줄곧 1번을 답하다 마지막에 2번을 택한거다.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이자 극복이기도 했다"며 에이햅 캐릭터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배우들은 고립된 상황에서 극한의 사투를 벌여야 했다. 특히 하정우는 '고생 전문 배우'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영어 대사부터 액션, 전술, 컨트롤타워 역할에 탈출까지 한계를 뛰어넘는 열연을 펼쳤다. 혹시 인간이 극한 상황에 놓인 설정을 즐기는 감독의 심리 반영이 아닐까 싶지만 김병우 감독은 웃으며 "사람이 극한 상황에 몰려야 본인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지 않나. 관객이 에이햅의 마지막 선택을 동의하고 지지하며 그를 응원해주고 '너무 고생했다. 수고했다'는 마음이 드시길 바랐다. 그래서 에이햅을 더욱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고 인물의 내면을 엿볼 기회를 만들었다"고 나름의 변을 내놨다.
'PMC: 더 벙커' 김병우 감독 인터뷰 /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다만 그 역시도 고생하는 배우들을 보며 애잔한 마음이 들긴 했다고. 그는 "슬레이트치고 액션이 시작되기 전에 카메라가 미리 도는 시간이 약 10초가량이다. 그때 배우는 액션을 취하기 전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그때의 하정우 선배 모습이 굉장히 씁쓸하고 애잔해 보였다"며 "수많은 스태프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그 공간에 혼자 고립된 에이햅처럼 보여서 실제 그 장면을 영화에 넣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북한의 엘리트 닥터 윤지의로 등장한 이선균 또한 감독이 택한 신의 한 수였다. 윤지의는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제일 어려웠던 인물이었단다. 인물에 대한 명분도 있어야 하고 에이햅을 각인시키는 존재로서 기능적 역할도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에이헵 자체로 흘러가는 영화에선 다른 결을 지닌 인물이 중심부에 개입되는 것인 만큼 유기적인 연결고리가 필요했다. 감독은 윤지의가 그저 소모되는 캐릭터가 되지 않길 바랐지만 이를 표현하는 건 쉽지 않았다고. 그때 떠오른 인물이 배우 이선균이었고 감독은 "존재감만으로 인물을 설명할 수 있는 분이었다. 정말 더할 나위가 없었고 이 자리를 빌려 정말 감사드린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5년 전 '괴물 신인 감독의 탄생'이란 강렬한 인상은 여전한데, 김병우 감독의 실제 모습은 조용하고 침착하며 단정하다. 그럼에도 그가 만들어낸 작품들은 대단히 새롭고 신선하며 과감하다는 게 참 묘한 반전이자 매력인 듯하다. 어떤 사람일지 그 실체가 더 궁금해지는 인물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김병우 감독은 그저 멋쩍게 웃으며 "예전에도 저는 지금과 똑같았다. 그냥 어릴 땐 말수가 좀 더 많았던 것 같다"고 심심한 답변이다.
하지만 "영화를 잘 찍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제가 시나리오를 쓰다가 너무 힘들어서 칠판에 '어디서 영화를 설렁설렁 찍냐'고 썼던 적이 있다. 이건 제게 하는 이야기다. 앞으로 계속 영화를 찍더라도 끝까지 스스로 최선을 다했단 생각이 들 만큼 열심히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의 담백한 말 속에 영화에 대한 넘치는 열정과 애정이 가득했다. 열 마디 말보다 하나의 진심을 전하기엔 충분했다.
한예지 기자 ent@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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