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한예지 기자] 배우 송강호에게 '마약왕'은 새로운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자신 스스로를 파멸의 구덩이에 몰아넣고 극한의 감정으로 치닫았다. 그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내부자들' 우민호 감독과 송강호가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기대를 불러일으킨 영화 '마약왕'(제작 하이브 미디어코프)은 1970년대 밀수꾼에서 마약왕이 된 이두삼의 일대기를 통해 시대의 아이러니를 그린 작품이다.
송강호가 연기한 이두삼은 권력과 부에 눈을 뜨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지만 결국 욕망에 잠식돼 파멸되는 인물이다. 독재정권의 암울한 시대상과 맞물린 이두삼의 흥망성쇠는 연민을 철저히 배제하며 파격과 광기로 점철된 말로를 보여준다.
그동안 평범하고 투박하지만 응어리진 시대의 고통을 통감하는 소시민의 모습으로 관객에 위로와 희망이 됐던 송강호는 시대가 낳은 괴물로 변이해 공포심과 거북감을 자아낸다. 참 아이러니하고 기묘한 감상을 주는 변화다. 하지만 송강호는 이런 변화가 도리어 반가웠단다. "열심히 좋은 작품들을 선택하다 보니 근래 10년간은 소시민적이고 정의로움을 갈구하는 인물들을 많이 연기했었다"는 그는 "이 작품이 반가웠던 건 과거 제가 '초록물고기' '넘버쓰리' 등에서 보여드린 모습을 자유롭게 변주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송강호의 오래된 반가운 얼굴과 더불어 또다른 얼굴이 나올 수 있겠구나 싶었다"고 털어놨다.
대한민국의 70년대를 집약한 인물로의 변신, 이두삼이 무너지는 모습을 따라가는 작법 등 모든 것이 그를 설레게 했다. 송강호는 '마약왕'을 두고 "새로운 도전이자 모험"이라고 표현했다. 기존에 익히 봐왔던 캐릭터나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할지라도 어떤 시각으로 접근해 어떻게 설명하는지에 따라 전혀 새로운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송강호는 '마약왕'을 통해 기시감을 느꼈다. 과거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캐스팅 제안을 받았을 때 일화다. 무려 세 번이나 배역을 거절했지만 네 번째엔 직접 박찬욱을 찾아갔다. 박찬욱은 세 번이나 거절하고 다시 찾은 이유를 물었다. 그때 송강호가 한 대답은 "거절한 이유와 하고 싶은 이유가 동일했다"는 것이다. 막연하고 두려웠기 때문에 거절했지만, 그렇기에 배우로서 도전해보고 싶었던 갈망이 일었다고. 그가 '마약왕'을 택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송강호에게 '마약왕'은 매력적이면서도 고난의 작업이었다. 이유는 일반 드라마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새로운 양식과 모습으로 이두삼이란 인물의 파멸을 그리다 보니 그조차도 생경하고 어려웠던 까닭이다. 그는 "새로움에 대한 매력은 느끼지만 두려움은 있었다. 그래도 지금 저는 매우 만족한다. 강렬하고 새로운 방식이 관객들에 낯설 순 있겠으나 이것이 다양한 한국 영화 중에서도 새로운 모습이라고 자부하고 싶다"고 자신했다.
이두삼은 극 중 12년의 세월을 거쳐 하급 밀수업자에서 아시아 최고의 마약왕으로 거듭나며 엄청난 변화를 맞닥뜨리는 전기적 인물이다. 송강호는 "전반부엔 좀 익숙한 얼굴이 있지만 늘 해왔던 얼굴들 속 하나의 얼굴이 새로 나왔다. 단순히 피폐해져 가는 얼굴이 아니라 내면의 무너져가는 자아를 잡기 위해 발버둥 치는 걸 표현하고 싶었고 그런 모습이 새롭게 나타나지 않았나"라고 자평했다.
'마약왕' 송강호 인터뷰 / 사진=쇼박스 제공
영화 후반 30분가량 몰아치는 그의 독주는 실로 대단하다. 또한 영화적 기법으로도 기존 상업영화와는 궤를 달리하는 연출 방식이 돋보인다. 마치 하나의 연극 무대를 보는 듯한 화면 구성과 더불어 외로움과 고독 속에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며 몸부림치는 송강호의 모습은 낯설고도 강렬했다. 마치 잘못된 선택과 믿음으로 비극을 자초하며 파멸하는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속 '리어왕'을 연상케 했다.
송강호는 해당 신을 찍으며 그 역시도 외로웠다고 고백했다. 그는 "세상 안 외로운 사람 어딨겠나 싶지만, 결국 혼자 해내야 하는 직업이지 않나. 후반부 촬영은 고독한 몸부림이었고 처음으로 유달리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 했다. 또한 막연한 어려움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흐름이나 감정을 자연스럽게 해야 하는데 영화 현장이라는 것이 순차적으로 찍을 순 없지 않나. 그래도 이두삼이란 인물을 초반부터 하나하나 밟아가다 보니 감이 잡히기 시작하더라"고 했다.
송강호가 말하길 이두삼은 범죄 집단에서 출발했고 마약 세계로 빠져들지만, 그 과정은 정상적이지 않다.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느낌의 비즈니스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했다. 한 번 수렁에 빠지면 끝없이 헤어나오지 못하는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과 집착을 갖고 이 범죄 세계가 추구하는 함정에 빠지는 인물이었다.
그는 "마지막에 이두삼이 아내에게 '내가 너한테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하는 말이 가장 이두삼다운 대사가 아닐까 싶다"고 귀띔했다. 그때 이두삼이 느낀 감정은 회한일 테다. 파멸의 중심부에 섰을 때 가장 소중했던 것이 무엇인가. 이를 그리워하고 본인도 그런 삶을 꿈꿔왔지만 이미 자신의 위치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회한과 좌절, 절망을 집약하는 대사였다고.
우민호 감독과의 작업은 송강호에게 새로운 기폭제가 된 듯했다. 그는 우 감독에 대해 "호방하면서도 섬세한 감성을 동시에 갖고 있어 저와 잘 맞았다"며 "처음엔 감독님이 어떻게 이 이야기를 구현할지 정말 궁금했는데 기존 영화의 익숙한 믿음을 깨고 용감하게 승부를 걸었다. 제게도 새로운 도전이자 모험이었다"고 했다. 그 결과는 이제 관객들의 몫이며, 자신 또한 영화의 완성본을 보고 "기분 좋게 진이 빠지는 느낌"이었단 송강호다.
대한민국 대표 배우란 수식어가 너무나도 당연한 송강호지만 그 또한 매 작품 이토록 치열하게 고민하며 열렬히 도전한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자신은 좋은 사람들, 뛰어난 예술가들과 함께 그들이 만들어내는 작품에 동반할 수 있던 행운아였다며 자신을 낮추는 그다. 배우 송강호가 왕관의 무게를 누리는 법이다.
한예지 기자 ent@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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