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한예지 기자] 백색 황금가루에 1970년대 독재정권의 암울한 시대상을 녹여냈다. 부질없는 욕망의 덧없음은 마약왕의 몰락과 함께 관객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된다. 영화 '마약왕'이다.
'마약왕'(감독 우민호·제작 하이브 미디어코프)은 근본 없는 밀수꾼이 마약왕이 되기까지 12년의 세월을 오롯이 한 인물의 삶에 초점을 맞춰 담아낸 영화다.
구수한 바닷바람이 불어올 것만 같은 밝고 힘찬 부산의 정겨운 운치와 함께 흘러나오는 직소의 '스카이 하이(SKY HIGH)'를 시작으로, 부산에서 금붙이 따위를 밀수하던 하급 밀수업자 이두삼(송강호)의 모습과 함께 장대한 서사의 시작을 알리는 가수 정훈희의 '꽃길'이 펼쳐진다. 이어 중앙정보부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에 눈을 뜬 이두삼이 점차 마약 업계를 잠식하는 순간은 사이키델릭한 사운드와 퇴폐적 보컬이 매력적인 김정미의 '바람'과 함께 녹아든다.
일본에서 '히로뽕' 재료를 가져와 한국에서 제조한 뒤 일본에 다시 팔아넘기며 '메이드 인 코리아'란 자부심을 갖고, "이게 바로 애국 인기라"를 외치며 축적되는 부와 '뽕'에 취해가는 그의 모습은 실체 없이 격하게 일렁이는 바람과도 같다.
아시아를 주름잡는 마약 업계 대부로 성장해 꿈에 그리던 권력의 중심에 섰던 이두삼이 일순 독주하다 파멸하는 결말 부분은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가 차용됐다. 찬란한 지난날의 추억은 오간데 없고 가엾은 영혼의 아리아를 뿜어내며 비극을 맞는 인물을 휘감아 잠식하는 음울한 선율, 그 여운이 상당하다. '마약왕'은 가요부터 클래식까지 이두삼의 인생사에 적재적소 배치된 음악들로 인물의 내적 심리와 갈등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앞서 '내부자들'에서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사건 중심의 플롯으로 정경유착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던 우민호 감독은 이전의 익숙한 화법을 트는 과감함을 보여준다. '마약왕'은 철저히 인물 중심의 서사다. 한 인물의 흥망성쇠가 담긴 방대한 세월의 흐름을 자잘하게 늘어놓는 플롯은 다소 지루하고 단조롭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속에 녹아든 수많은 비유와 은유는 블랙코미디 요소를 더하며, 여기에 우민호 감독 특유의 '말 맛' 살아있는 뼈 있는 대사들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뽕쟁이 될래, 빨갱이 될래"란 대사 한 마디로 그 시대의 비뚤어진 이데올로기를 담아내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 속에 녹아든 수많은 비유와 은유를 엿본다면 한 인물의 일대기 이면에 당시 시대상과 이에 따른 아이러니를 담아낸 지점이 꽤 흥미로울 것이다.
영화 '마약왕' 리뷰 / 사진=영화 '마약왕' 포스터
1970년대라 하면 박정희 정권이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유신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온갖 제도적 폭력을 동원해 국민을 통제하고, 개인보다 국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애국적 국민을 만드는데 주력했던 시대다. '잘 먹고 잘살자'란 슬로건이 휘날리고 '새마을 운동' 등을 통해 퇴폐적 사회 풍조를 일소한단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우던 때. 그러니 이런 시대에 실제로 국내에서 탐욕의 백색 가루인 마약 유통과 밀매가 빈번히 이뤄졌단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우스운 모순인가.
마약왕 이두삼을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는 열혈 검사 김인구(조정석)가 수사본부를 차린 곳이 미싱 공장이란 점도 몹시 상징적인 비유다. 당시 선진국이 장기간에 걸쳐 이룩한 산업화 과정을 수년 만에 달성한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고도성장'의 바탕은 노동자들의 짓밟힌 인권으로 얼룩진 것이었다. 독재정권은 노동자들에 최소한의 생존권도 보장하지 않고 노동에 시달리게 만들었고 이런 경제 구조 속에 재벌은 온갖 특혜를 받으며 성장해 정경유착과 같은 관향이 만들어졌다. 그 시절 피땀 흘려 일한 노동자들 하루 일당이 500원이고, 이두삼이 백색 황금 가루 흩뿌려 벌어들인 돈은 10억 원이란 자괴감 드는 격차는 그저 허탈하다.
이밖에도 유신 반대 운동을 펼치다 납치된 후 풀려난 김대중, 학생들의 민중봉기, 멸공의 횃불, 그리고 마침내 1979년 궁정동 한 만찬장에서 부하의 손에 총살당해 종지부를 찍은 유신의 역사, 이와 더불어 땅을 치며 통곡하는 가엾고 씁쓸한 국민들의 모습까지. 이는 찰나의 흑백 뉴스로 비춰질 뿐이지만, 이 강력한 은유는 이두삼의 일대기에 언뜻 번뜻 스치는 70년대 주요 정치 사회문화 사건들의 연대기로 더욱 뇌리에 박힌다.
결국 이두삼이란 인물을 통해 그려낸 욕망과 파멸이란 메시지는 화려하고 부질없던 70년대 독재정권의 암울한 말로를 뜻한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매질을 당하던 이두삼이 느낀 공포의 발현은 검은 욕망이었고, "전화 한 통 넣을 빽 없으면 이 나라에서 못 산다"는 개똥철학을 갖고 "내가 이 나라를 먹여 살렸다"며 스스로의 그릇된 신념에 심취돼 자신의 욕망이 곧 애국이라 말하는 비뚤어진 애국심과 당위성은 얼마나 끔찍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는지. 이에 잠식된 이두삼이 맞이한 결말은 그렇기에 더욱 처참하고 파괴적이다.
극은 다양한 등장인물이 등장하나 좀처럼 송강호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뚫고 나오지 못한다. 남다른 위압감을 주는 '마약왕'이란 타이틀부터 송강호를 위한 영화다. 그동안 평범하고 투박하지만 응어리진 시대의 고통을 통감하는 소시민의 모습으로 진정성을 전하며 관객에 큰 위로와 희망이 되어준 송강호는 시대가 낳은 괴물로 변이해 공포심과 거북함을 자아낸다. 참 아이러니하고 기묘한 감상이 아닐 수 없다.
정의감 투철한 '무대포' 검사의 궤는 '내부자들' 우장훈을 넘어 '마약왕' 김인구로 연결된다. 권력의 힘에 눌려 번번이 실패할지라도, 근본적인 검은 권력을 뿌리 뽑고자 하는 인물의 넘치는 정의감으로 영화는 그나마 숨통이 트인다. 감독이 나름 희망적 판타지를 투영한 캐릭터임은 틀림없다. 12월 19일 개봉.
한예지 기자 ent@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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