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디자이너 크리스티찬 라크루와는 이브 생 로랑(Yves Henri Donat Mathieu-Saint-Laurent)에 대해 “샤넬의 형식, 디올의 풍부함, 엘자 스키아 파렐리의 재치를 겸비했다”고 평했다.
2008년 6월 1일 71세 나이로 생을 마감한 그는 프랑스 패션산업을 중심으로 이끈 크리스찬 디올, 코코 샤넬과 함께 20세기 패션 아이콘으로 불린다. 부유층의 소유물이었던 오뜨 꾸뛰르를 대중화 시킨 선구자 중 하나다.
최근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상영되면서 디자인 가치관과 브랜드 히스토리에 대해 회고하는 이가 많아졌다.
생 로랑은 1936년 8월 1일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소년기를 거쳐 17세가 되던 해 디자인이 담긴 스케치북을 들고 파리로 이주했다. 디자인 실력을 인정한 미젤 드 브뤼노프 패션잡지 ‘보그’ 편집장의 추천으로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의상실에서 일하면서 패션계 입문한다.
제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건 21세 되던 해다. 크리스찬 디올이 갑작스레 세상을 뜨자 그의 뒤를 잇기 시작했다. 생 로랑은 “디오르가 나에게 예술의 기초를 가르쳤다”며 “함께 일했던 시간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추억했다.
이후 1962년 평생의 동반자가 된 피에르 베르제(Pierr Berge)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명품 브랜드 ‘이브 생 로랑 (Yves Saint Laurent)’을 창립했다. 순수하고 기품 있는 선으로 우아하고 여성스러움을 표현하는 것이 브랜드 핵심이미지다.
‘오뜨 꾸뛰르’ 패션을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게 시도한 그는 ‘패션의 대중화’를 선언했다. 남성의 턱시도에서 착안한 ‘르 스모킹(le amokimg)’을 디자인해 처음으로 여성 정장에 바지를 도입하기도 했다. 의류에 국한되지 않고 향수나 장신구 등으로도 사업 영역을 넓혔다. 1970년대에만 해도 생소한 시장이던 한국과 일본 등의 아시아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했다.
사업이 항상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971년에 내놓은 일부 의상들은 전쟁을 미화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고 ‘오피움(Opium)’이라는 이름의 향수는 마약 사용을 미화했다는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2002년 패션계에서 은퇴하기 전 브랜드 역량을 넓히기 위해 구찌 그룹에 ‘이브 생 로랑’을 인수했다. 인수 이후 톰 포드에 이어 2004년 임명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스테파노 필라티에 의해 브랜드 히스토리는 전승되고 있다.
현재 이브 생 로랑은 기성복, 핸드백, 주얼리, 선글라스 등을 디자인하고 제작, 판매하는 기업으로 발전했다. 전 세계 주요 시장에서 직영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스포츠투데이 스타일뉴스 이수정 기자 stnews@s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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