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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퍼즐]'핵주먹' 마이크 타이슨, 실패와 성공을 거듭한 드라마틱 복서
작성 : 2015년 10월 06일(화) 17:38

마이크 타이슨/사진=영화 '타이슨(2008)' 스틸컷

[스포츠투데이 김광선의 복싱킹]'핵주먹' 마이크 타이슨(Mike Tyson·49). 주먹이 얼마나 강했으면 '핵주먹'이란 별명이 붙었을까?

타이슨은 데뷔 후에 19번 연속 K.O승을 이끌었고, 그중에 11번이 1회 K.O였으며, 가장 오래 끈 시합이 6회였다. 1986년 트레베 버빅을 2회 K.O로 눕히고 사상 최연소 챔피언에 오르면서 그는 '핵주먹'이란 별명을 얻는다.

전문가들은 그의 전성기의 펀치력을 1톤(ton)으로 추정하고 있다. 말하자면, 타이슨의 주먹을 정면으로 받아낸 경우, 1톤 트럭에 정면충돌하는 것과 같은 충격을 받는 셈이다. '핵주먹'은 이 계산에서 나왔다.

타이슨은 뉴욕 최악의 할렘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문제아로 성장했다. 소매치기, 강도, 불법 총기 소지 등 혐의로 10대 초반에만 3년 동안 무려 50번이 넘게 체포되고 결국 소년원에 수감된다. 그의 복싱 인생은 이 소년원 생활에서 시작된다.

소년원 생활 중 그곳에서 전직 권투선수였던 바비 스튜어트를 만나 복싱과 인연을 맺는다. 스튜어트는 타이슨에게 "복싱은 싸움이 아니라 스포츠다”라며 “지금의 태도를 고친다면 복싱을 가르쳐주겠다."라고 약속한다. 이후 타이슨은 더 이상 난동을 안 부리고 심기일전, 모범수가 되어 복싱 선수의 길에 들어선다.

마이크 타이슨과 커스 다마토/사진=유튜브 영상 화면 캡쳐(https://youtu.be/DnRVunw5-pQ)



모범수로 출소한 타이슨을 스튜어트는 정식 권투선수로 만들기 위해 한 트레이너에게 데려간다. 그가 바로 프로이드 패터슨, 호세 토레스 등 세계 챔피언을 두 명이나 만들어낸 커스 다마토다.

당시 커스 다마토는 72세의 나이로 은퇴를 하고 편안한 노후를 즐기며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스튜어트로부터 타이슨의 불우한 환경과 뛰어난 재능을 소개받은 다마토는 인생의 마지막을 타이슨과 함께 하기로 하고 타이슨을 제자로 받아들인다. 타이슨의 나이 14살 때이다.

다마토는 자신의 열정을 다해 타이슨에게 복싱을 가르쳐 주고, 글을 읽지 못하는 타이슨에게 가정교사를 붙여 글을 지도한다. 그리고 타이슨이 16살 나던 해 아예 그를 자신의 양자로 입양하기에 이른다.

타이슨은 스승이자 양아버지인 다마토의 한없는 사랑에 맘을 열고 복싱에 매진하며 새 삶을 개척하기 시작한다. 그러기를 5년. 지독한 훈련 끝에 19살 나이에 타이슨은 복싱 3개 단체(WBA, WBC, IBF)의 최연소 챔피언으로 탄생한다. 이때까지의 전적은 54전 50승 4패였다. 그러나 타이슨이 챔피언 자리에 오른 그해 다마토는 세상을 떠난다.

다마토는 지금까지도 프로 복싱계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 손꼽는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권투 해설가들은 "만약 다마토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세계의 복싱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입을 모을 정도다.

다마토가 훌륭한 지도자라는 사실은 그가 여러 명의 챔피언을 키워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천문학적인 대전료를 받는 챔피언의 트레이너이고 코치였지만 챔피언들로부터 단 한 푼도 받지 않았다. 그가 사망했을 때 그의 명의로 된 재산도, 금융계좌도 없었다. “프로의 세계에 이런 천사가 존재할 수 있는가”라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다마토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마토가 얼마나 위대한 지도자였는가는 세기의 전설 무하마드 알리의 삼고초려(三顧草廬) 일화에서도 입증된다. 생전 알리는 그와 같이 일하고 싶어 여러 번 사람을 보내 뜻을 전했고, 그의 거절이 이어지자 직접 다모토 면담을 요청했지만, 다마토는 끝내 알리를 만나주지 않았다.

/사진= 마이크 타이슨과 에반더 홀리필드 경기 포스터.



시간이 흘러 타이슨은 드디어 '영원한 천적' 에반더 홀리필드와 만난다. 위대한 두 선수가 세기의 대결을 펼칠 때가 왔다. 전 세계가 흥분하고 이 경기에 기대를 쏟았다.

1996년 11월 24전 전승 20KO의 홀리필드와 핵주먹 타이슨의 대결이 성사된 것이다. 도박사들은 6:1로 타이슨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하지만 필자는 아니었다. 홀리필드의 승리를 예측했다. 한 번 진 선수는 두 번, 세 번 경기해도 꼭 패한다는 내 경험에서 나온 지론 때문이다.

두 선수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9라운드까지 양 선수는 라운드를 주고받으며 팽팽한 경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10라운드 종료 20초를 남긴 상태에서 홀리필드의 특기인 원투스트레이트가 타이슨의 턱을 크게 때렸다. 충격을 입은 타이슨은 다시 일어나지만, 11라운드 충격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력한 스트레이트 공격으로 타이슨은 쓰러진다. 레프리가 TKO를 선언하면서 세기의 대결은 그렇게 홀리필드의 승리로 끝났다.

마이크 타이슨이 에반더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고 있다. /사진= 경기 영상 화면 캡쳐



1997년 6월, 타이슨은 빼앗긴 타이틀과 명예를 되찾기 위해 홀리필드와 재대결을 벌인다. 하지만, 타이슨은 이렇다 할 기술도 펼치지 못한 채 3라운드에 서로의 몸이 엉키자 갑자기 상대의 귀를 물어뜯어 실격패 당한다. 이것이 타이슨 '핵이빨사건'이다.

타이슨은 이 사건으로 1년간 선수자격정지 중징계를 받고 선수인생에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홀리필드의 벽을 넘지 못한 타이슨은 결국 '핵주먹 타이슨'에서 '핵이빨 타이슨'으로 조롱의 대상이 된다.

2002년 타이슨은 재기를 선언하고 다시 챔피언에 도전한다. 그러나 레녹스 루이스에게 도전했지만 K.O패를 당하고, 이어서 대니 윌리엄스와 케빈 맥브라이드에게 연속해서 K.O패를 당한 후 조용히 은퇴를 하고 만다.

링에서의 화제만큼, 타이슨은 사생활에서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슈 메이커였다. 1992년에는 데지레 워싱턴을 강간하며 감옥에서 3년간 복역했는가 하면, 2003년에는 권투선수로서 큰돈을 벌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산을 선언, 추락을 거듭했다.

마이크 타이슨과 부인 라키하 스파이스. /사진=유튜브 영상 화면 캡쳐



파산 후 정신을 차린 타이슨은 2009년 라키하 스파이스와 결혼한 뒤 돈 관리를 아내에게 맡겼다. 타이슨은 최근 "100일 동안 술을 마시지 않았고 약물을 사용하지 않았다"면서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지독한 알코올 중독으로 죽음 직전에 있는데 술에 취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타이슨은 현재 배우로 변신한 상태다. 현역 시절에도 배우로 활동했고, 은퇴 후는 배우로 전업.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동안 타이슨이 출연한 극영화는 모두 10편으로, 이 가운데 '마이크 타이슨 : 언디스퓨티드 트루스'(2013)에서는 단독 주연을 맡았다. 출연작 가운데 '무서운 영화' 4, 5편과 '록키 발보아'는 흥행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사진=영화 ‘마이크 타이슨 : 언디스퓨티드 트루스(2013)’ 포스터



타이슨은 최근 홍콩스타 전쯔단(견자단)과 액션영화 '엽문 3'에 투톱으로 출연, 화제에 올랐다. 이 영화 제작발표회에서 전쯔단은 마이크 타이슨을 이렇게 치켜세웠다. "두 사람이 대결을 펼친다면 누가 더 승산이 있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나(전쯔단)는 그(타이슨)와 같은 링에 오를 자격이 없다.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한 챔피언이고 나는 무술을 할 줄 아는 영화인 일 뿐이다."


스포츠투데이 김광선 KBS 해설위원 SPORTS@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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