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김광선의 복싱히스토리] 복싱 글러브를 처음 창안한 사람은 영국인 잭 브로턴이다. 그는 1734년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 머플러즈(Mafflers)라 불리는 새로운 글러브를 창안했는데 그것이 복싱 글러브의 시초가 되었다.
1925년 초 YMCA는 복싱을 실내 운동회의 정식 종목으로 채택했다. 그리고 다음해 1월 30일 제9회 YMCA 체육부 주최 체육대회에서 처음으로 공식 복싱 경기가 열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복싱선수권대회는 일제 강점기인 1928년 6월 22일 YMCA가 주최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한 ‘제1회 전 조선 권투대회’이다.
우리 민족이 올림픽에 출전한 것은 1932년 ‘제10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 처음이다. 이 대회에 마라톤의 김은배, 권태하, 복싱의 황을수 등 3명이 일본 대표 선수로 일장기를 달고 태평양을 건너서 참가했다. 따라서 황을수 선수는 올림픽에 출전한 첫 한국인 복서로 기록된다.
강원도 철원 태생인 황을수 선수는 이 올림픽에 라이트급으로 출전하였다. 해방 후 남쪽에 정착하였다가 한국전쟁 이후 월북했다. 1963년 북한에서 공훈체육인 칭호를 받고 조선올림픽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최초로 출전한 대회는 1948년에 열린 ‘제14회 런던 올림픽’이다. 이 대회에 당시 성균관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한수안(1925~1998)선수가 플라이급으로 출전해 동메달을 거머쥐었다. 이 동메달은 한국 최초의 올림픽대회 복싱 메달이다.
한수안은 뛰어난 스피드와 파괴력을 가진 전형적인 인파이터로서 대부분의 경기를 초반 KO승으로 장식하며 플라이급에서 미들급에 걸쳐 국내 및 아시아 1인자로 군림했다.
그는 런던 올림픽 대회에 출전해 예선에서 가우스테니와 코친을 판정으로, 콜만을 2회 KO로, 마도치를 판정으로 누르며 준결승까지 올랐을 때 현지 언론들은 그와 대적할 선수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언어장벽과 불운이 그의 금메달 획득을 가로막았다. 오후 4시로 예정되어 있던 경기시간을 오후 7시로 잘못 알고 있다가 이를 뒤늦게 깨닫고 식사를 하다 말고 출전한 그는 이탈리아의 반디델 선수를 상대로 2차례 다운을 빼앗으며 선전했으나 아깝게 판정패해 동메달을 획득하는 데 그쳤다. 그는 1952년 헬싱키 올림픽 대회에도 출전했으나 예선에서 탈락하는 비운을 맛보았다.
장교로 입대해 한국 복싱 팀의 효시인 해병대 복싱 팀을 창단하고 한때 복싱 사범으로 활동하는 등 한국 복싱의 발전에 기여한 한수안의 필생의 꿈은 자신의 체육관을 세워 후배들을 길러내는 것이었다.
아들 한창덕을 복싱 선수로 만들면서까지 복싱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그는 이후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 남대문시장을 맴돌면서도 이 꿈을 버리지 않았으나, 끝내 이 꿈을 이루지 못했다. 불운의 복서 안수안의 히스토리는 여기서 멈춘다. (브리태니커 백과 참조)
한수안의 올림픽 메달 수상 꿈이 꺾인 제15회 헬싱키 올림픽에서는 강준호(1928~1990)가 밴텀급으로 출전해 동메달을 따냈다. 이때 그는 준준결승에서 당시 세계챔피언이었던 미국의 무어(Moor D)에게 압승, 큰 화제가 되었다.
헬싱키 올림픽에는 44명의 한국 선수가 출전했는데, 강준호와 역도의 김성집이 각각 동메달을 따내 국민들에게 큰 위안을 안겨주었다. 지금으로 보면 별 것 아닐지라도 당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변방의 나라 대한민국의 존재를 알리기에 충분한 결과였고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러 넣어주는데 활력소가 되었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강준호는 21살 때 함경남도 원산의 복싱체육관에서 권투를 시작했다. 그는 입문 1년만인 1950년 5월 북조선아마추어복싱선수권대회에 출전, 페더급에서 우승하였으며, 그 뒤 6·25 한국전쟁 때 월남, 수도사단에 현지 입대하여 13년 동안 군에 복무하였다.
헬싱키 올림픽 이후 강준호는 1954년 제2회 마닐라 아시아경기대회와 1958년 동경 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하였으나 메달을 따지 못하자 지도자의 길을 택하였다.
1963년 육군에서 제대한 뒤 1967년 5월부터 1년간 ‘올림피아 짐’(당시 박정희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가 운영)에서 후배들을 지도하다가 태릉선수촌에서 코치로 활약하였다. 1968년 제19회 멕시코 올림픽대회에 코치로 참가하여 라이트 플라이급 지용주(은메달)와 밴텀급 장규철(동메달)이 입상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1972년 제20회 뮌헨 올림픽대회에도 코치로 참가하였다.
한수안 강준호 선수의 올림픽 투혼을 밑받침으로 대한민국의 권투는 아시아를 넘어 서서히 세계무대로 진입, ‘권투왕국’을 쌓아가기 시작한다.
* 필자 : 김광선
83 로마월드컵 금메달리스트 / 86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 87 세계월드컵 금메달리스트 / 88서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 / 대한체육회 선수위원, 육군사관학교 교수, 국군체육부대 감독 역임 / 현 국가대표선수회 이사, KBS 해설위원 / 훈장 - 체육훈장 기린장(86), 백상체육대상(86, 88), 체육훈장 청룡장(88)
스포츠투데이 김광선 KBS 해설위원 SPORTS@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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