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이상필 기자]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13년 만에 한국 축구 수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정몽규 회장은 지난달 29일 성명서를 통해 "축구협회를 맡아 운영하는 동안 여러 가지 논란과 비판이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다 제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한다"며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이 끝난 뒤 축구협회장 자리에서 물러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어 "대표팀이 본선에서 성과를 내도록 지원하는 것이 협회장으로서 마지막 소임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했다.
이로써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정몽규 시대'는 북중미 월드컵을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 프로축구연맹 총재에서 '한국 축구의 수장'으로
정몽규 회장은 '한국 축구계의 거두'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의 사촌동생이다. 울산 현대(현 울산 HD), 전북 현대 구단주를 지냈으며, 2000년부터는 부산아이파크의 구단주를 맡고 있다. 지난 2011년에는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로 추대됐으며, 재임 기간 동안 K리그 승강제 정착, 승부조작 사태 수습 등의 성과를 남겼다. 이후 정 회장은 2013년 제52대 대한축구협회장 선거에 출마했고,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허승표 후보를 꺾고 당선되며 한국 축구 수장 자리에 올랐다.
정 회장의 당선을 두고 당시 축구계에서는 기대와 걱정이 공존했다. 프로축구연맹 총재 시절 성과에 주목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현대가의 그림자가 짙은 대한축구협회에서 또 다시 현대가 인물이 회장을 맡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시선도 있었다.
특히 취임 후 첫 번째 빅 이벤트였던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대표팀이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자, 대한축구협회와 정 회장에게 비판의 화살이 향했다. 정 회장은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열고 직접 고개를 숙여야 했다.
▲ 2022 카타르 월드컵 16강·대한민국 축구종합센터 건립 등 성과 남겨
불안한 출발과 달리 정 회장은 이후 무난히 직무를 소화했다. 2015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에서 준우승, 여자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의 성과를 거뒀다. 2017년에는 FIFA 평의회 위원에 당선됐으며, 한국에서 열린 2017 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도 큰 문제 없이 개최했다.
또한 2019 FIFA U-20 월드컵 준우승, 한국 축구의 새로운 요람이 될 대한민국 축구종합센터(코리아 풋볼파크) 건립을 이끌었다.
특히 2017년 거스 히딩크 감독 선임 논란 이후 기존에 한계를 보였던 기술위원회 체제를 개편, 국가대표 감독선임위원회(현 전력강화위원회)를 신설했다. 이를 통해 2018 러시아 월드컵 이후 파울루 벤투 감독을 선임했으며, 이는 2022 카타르 월드컵 16강 진출이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그사이 정몽규 회장은 2016년 제53대, 2021년 제54대 대한축구협회장 선거에 모두 단독 출마해 당선, 3선을 달성했다.
빈 자리가 보이는 서울월드컵경기장 / 사진=DB
▲ 독단적 결정·연이은 악수…감독 선임 논란·기습 사면 시도로 축구팬 신뢰 상실
그러나 정몽규 회장은 2019년과 2023년 FIFA 평의회 위원 선거에서 연이어 낙선했고, 이는 한국 축구 외교에 큰 타격이 됐다.
독단적인 결정과 악수도 이어졌다. 2022 카타르 월드컵 이후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을 선임을 강행했고, 이는 '황금세대'로 불리던 축구대표팀의 아시안컵 실패로 이어졌다. 또한 2023년 3월 승부조작 축구인 기습 사면 시도는 축구팬들의 신뢰를 상실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후에도 정몽규 회장과 대한축구협회는 홍명보 감독 선임 과정에서 불투명한 절차와 공정성 논란으로 비판을 자초했다. 정몽규 회장이 국내 개최 A매치에 참석할 때마다 축구팬들은 거센 야유를 퍼부었다.
정 회장에 대한 비판 여론은 대표팀에 대한 무관심으로도 이어졌다. 평소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A매치가 열릴 때면 5-6만 명 이상의 구름 관중이 찾아 대표팀을 응원했지만, 지난해 10월 파라과이전 관중 수는 2만2206명에 불과했다. 11월 가나전에서도 평소 절반 수준인 3만3256명의 관중을 동원하는데 그쳤다.
정몽규 회장과 대한축구협회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면서 문화체육관광부는 2024년 9월 대한축구협회에 대한 특정감사를 실시했다. 또한 감사 결과를 발표하며 정 회장에 대해 자격 정지 이상의 중징계를 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회장은 2025년 제55대 대한축구협회장 선거에 출마하며 4선에 도전했으며, 85%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4선에 성공했다.
▲ 비판 여론에도 버티던 정몽규 회장, 갑작스러운 사퇴 결정 배경은?
오랜 비판 여론에도 불구하고 정몽규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를 지켜왔다. 지난 3월에는 제55대 대한축구협회장 취임 1주년 기자 간담회를 갖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정 회장은 북중미 월드컵 16강 진출, 아시안컵 개최 추진, 향후 주요 사업 목표 등을 발표했다. 적어도 이 때까지는 정 회장에게 사퇴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지난 4월 법원이 대한축구협회가 문체부를 상대로 낸 특졍감사 결과 통보 및 조치 요구 취소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린 것이 정 회장의 심경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대한축구협회는 이사회를 갖고 항소하기로 결정했지만 이미 정 회장의 리더십에는 금이 간 뒤였다.
한 축구계 관계자는 "대한축구협회가 항소에서 승소하더라도 비판 여론은 바뀌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해 질 것이다. 또한 패소한다면 사퇴 요구는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이미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만약 월드컵에서 좋지 않은 성적을 거둔다면 축구 팬들뿐만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성토 여론이 커질 수 있다. 정 회장은 2년 전 국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고생을 한 경험이 있다. 또 다시 그런 상황을 겪는 것은 피하고 싶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정 회장의 사퇴가 북중미 월드컵을 앞둔 대표팀을 위한 결정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예전과 달리 월드컵 대표팀에 대한 응원 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의 사퇴를 통해 대표팀 만큼은 응원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결단이라는 것이다.
정 회장은 성명서를 통해 "우리 대표팀이 이번 대회에서 좋은 경기력을 펼치면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둘 것으로 믿고 있다"며 "대회 기간 동안 대표팀에게 아낌없는 지지와 응원을 보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 회장이 진정 대표팀을 생각했다면 월드컵이 임박한 시점이 아닌, 보다 일찍 사퇴를 결정했어야 했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지적이다. 지금 사퇴를 발표한 것이 오히려 월드컵에 집중해야 할 대표팀의 분위기를 흔들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사전 캠프를 진행 중인 대표팀은 정 회장의 사퇴에 대해 발표 전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 '포스트 정몽규 시대', 한국 축구를 이끌어 갈 사람은 누구?
이제 중요한 것은 '포스트 정몽규 시대'다. 정 회장의 사퇴 시점은 확실치 않지만, 북중미 월드컵은 7월 19일 폐막한다. 정 회장의 공언대로라면 늦어도 7월 중에는 사퇴를 할 것으로 보인다. 협회 규정상 보궐선거는 사유가 발생한 날로부터 60일 이내에 실시해야 하기 때문에 9월 중 보궐 선거가 열릴 가능성이 높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제55대 대한축구협회장 선거에서 정몽규 회장과 경쟁했던 허정무 전 감독, 신문선 교수다. 그러나 이들은 1년 여 전 선거에서 각각 한 자릿수 득표율을 얻는데 그쳤다. 두 사람의 득표율을 합쳐도 채 15%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축구인들 사이에서 현실적인 대안으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허구연 KBO 총재와 같은 인물이 축구계에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한탄도 나온다.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인물들, 특히 젊은 축구인들의 등판을 바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정 회장이 급작스럽게 사퇴를 발표한 데다, 당장 월드컵을 앞두고 있는 상황인 만큼 아직 마땅한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대표팀의 북중미 월드컵 일정이 끝나고 정 회장이 공식 사퇴한 뒤에야 본격적인 '포스트 정몽규' 경쟁이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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