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정예원 기자] 가벼운 콘텐츠가 대세인 시대, 무겁고 우울한 이야기도 통할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허수아비'의 완성도와 시청률 수직 상승엔 배우 이희준의 공이 컸다. 그가 보여준 박해수와의 앙상블은 박수를 받기 충분했다.
지난 26일 종영한 ENA 월화드라마 '허수아비'는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을 수사하던 형사가 자신이 혐오하던 놈과 뜻밖의 공조 관계를 맺으면서 펼쳐지는 범죄 수사 스릴러. 1회 2.9%(닐슨코리아 기준)로 출발한 시청률은 최종회 8.1%까지 상승하며 화제성을 입증했다. 이희준은 극 중 냉철한 판단력과 정치적 감각을 겸비한 검사이자 강성연쇄살인사건 수사를 주도했던 인물 차시영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먼저 "두 친구가 힘을 합해 멋지게 범인을 잡는, 그런 일반적인 드라마가 아니라 많이 좋아해주실 거란 생각은 못했다. 그래서 이 같은 관심이 더욱 놀랍고 행복하고 감사하다"는 소감을 밝혔다.
출연을 결심할 당시엔 성적에 욕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보통 4회까지의 대본을 먼저 받는다. 시영이 칼을 맞고 풀밭에 쓰러지는 장면까지 읽은 상황에서 감독님과 만났다. 당연히 '강태주(박해수)와 사이좋게 힘을 합치겠구나' 했는데 이후의 내용을 듣고 충격받았다. 범인을 잡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속으로 '흥행은 못하겠다' 싶으면서도 정말 멋진 기획이란 생각을 했다. 배우로서 신나는 일이었다. 뜨거운 여름이었지만 행복하게 잘 찍었다. 기대를 안 했는데 좋아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
차시영이란 캐릭터는 꽤 특별하게 다가왔다고. "이런 인물을 만나는 기회가 흔치 않다고 생각했다. 성장과정, 애정결핍, 인정욕구 등이 디테일하게 잘 짜여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잘 만들어주셔서 연기하는 내내 재밌었다"는 소회를 전했다.
매력적인 캐릭터였지만 연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시영에게 어떤 상처가 있을지, 내면에 신경을 많이 썼다. 진범을 잡는 걸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인물이란 걸 깨달았다"며 "사람이 이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시영의 성장 환경이 그런 괴물을 만든 게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아울러 "선과 악을 구분 짓고 연기하진 않았다. '이희준 또 험한 거 삼켰네'라는 댓글을 봤다. 그만큼 리얼하고 강렬하게 보인다는 평으로 읽혀 기억에 남았다. 저도 이제는 좋은 걸 삼키고 싶다"고 웃어 보였다.
작품에선 앙숙이지만, 실제로 박해수와는 20년 지기 절친이었다. "연극할 때부터 함께한 사이다. 드라마도 함께 많이 해서 벌써 4~5번째다. 서로 상대가 더 연기를 잘하면 어떡하지, 내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없다. 잘하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틈나는 대로 리허설을 하고 대사도 맞춰봤다. 처음 캐스팅됐을 땐 소속사 대표님께서 걱정도 하셨다. '이번에 잘 안 되면 같이 하는 건 마지막'이라고 했는데 생각 외로 잘됐다. 앞으로 몇 개는 더 하지 않을까. 박해수 씨와 앞으로도 함께 연기하면서 늙어가고 싶다는 얘기를 나눴다."
배우도, 스태프도 그 어느 때보다 진심으로 임한 현장이었단다. "촬영 전 해수 씨가 제게 '척하는 연기는 하지 말자'고 했다. 고민하는 척, 생각하는 척 말고 진짜 생각, 진짜 고민을 하자는 것"이라며 "소재가 소재인 만큼 배우뿐 아니라 스태프들까지, 현장에 있는 모두의 태도가 남달랐다. 스쳐 지나가는 피해자 사진 하나조차 공을 들여 준비했다. 누가 그렇게 하자고 한 건 아닌데 다들 허투루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분위기에는 박준우 감독의 공이 컸다. "감독님께서 배우들의 의견을 굉장히 많이 들어주셨다. 해수 씨의 아이디어도 장면에 반영됐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정말 배려하셨다. 지난해 7~8월, 한창 뜨겁던 시절 전남 해남에서 촬영을 했다. 그런데 낮 1시부터 3시까지는 무더위로 위험하다며 브레이크타임을 갖게 해주셨다"고 짚었다.
이어 "정말 쉽지 않은 선택이다. 쉬는 시간에도 제작비가 계속 나가기 때문이다. 저도 이런 광경을 처음 봤다. 목욕탕비도 지급해주셔서 냉탕에서 감독님과 만나기도 했다"며 "3시부터 촬영이 재개되면 모두가 한마음으로 노력했다. 이런 게 바로 사람을 움직이는 힘인 듯하다. 감독님께 이런 부분을 배운 것 같다. 진심으로 배려하면 더 큰 에너지로 돌아온다는 걸 알게 됐다"고 존경심을 표했다.
'허수아비'의 결말 또한 박 감독의 뚝심이 반영된 결과였다. 권선징악이 완전히 실현된 해피엔딩이 아닌, 다소 씁쓸하고 현실적인 끝맺음이었다. "제작사와 '결말을 이렇게 하면 대중들이 더 좋아하지 않을까' 하고 이야기를 나눴고, 저희에게도 의견을 많이 물으셨다. 결국은 원래 의도대로, 대중적이지 않고 더 잔혹한 현실에 가까운 결말을 택하게 됐다. 저도 이게 맞다고 본다. 드라마를 많이 해오면서 시청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물의 설정, 이야기 등이 바뀌는 경험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찝찝함이 남더라. 감독님께서 소신을 갖고 택하신 게 정말 멋지다고 느꼈다. 그런 걸 워낙에 두려워하지 않는 분이셨다."
작품의 백미였던 '진범 추리'도 박 감독의 철저한 준비 덕에 가능했다. "AI 전문 업체와 협업해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활용하셨다"며 "전 아내 이혜정 씨에게도 스포일러를 하지 않았다. '내가 범인'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4회에서 칼에 맞았을 때 '오빠 죽어?'라고 묻길래 '어, 나 여기서 죽어'라고 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간 강렬한 악역을 주로 맡아온 이희준. 향후에는 호감 가는 캐릭터를 하고 싶단 바람을 내비쳤다. "일부러 장르물 해야지, 센 거 해야지 하는 건 아니다. 차기작 '무빙2'에선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안 나온다."
작품을 고를 땐 본인의 소신대로 하는 편이라고. "회사에서 반대하는 작품들을 고집해서 해왔다. '지금 그런 거 할 때가 아니다' '좀 더 입지를 굳혀야 하는 중요한 시기다'라며 걱정도 하신다. 그런데 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 '허수아비' 4부 이후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걱정보다 신나는 게 컸다. 좀 마이너한 기질이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내달 개막하는 연극 '꽃, 별이 지나'도 언급했다. "갑자기 누군가 죽었을 때, 망자를 쉽사리 못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실 차기작을 촬영하면서 일정이 빠듯하지만 공연도 꼭 하려고 노력한다. 20년 간 함께한 형들과 하는 거라 빠질 수 없었다. 밤샘 촬영을 하고 연습실에 갔는데 너무 피곤하면서도 '안 했으면 어쩔 뻔했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라며 무대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아직 연기만큼 재밌는 걸 찾지 못했다는 그였다. "차시영 같은 캐릭터는 너무 어렵지만, 인물의 입장을 생각하다 보면 사람에 대한 좋은 공부가 된다. 뇌과학자가 뇌에 대해 계속 연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재밌고 흥분되는 일이다."
끝으로 이희준은 '좋은 선배가 되는 것'에 대한 생각을 전했다. "어느덧 나이가 들어 어린 후배들과 함께하고 있다. 내가 선배들에게 받은 만큼 해주고 있는지를 생각하다 보면 부족함을 느낀다. 존경하던 선배들처럼, 나도 후배들에게 그렇게 해주자고 다짐한다. 오늘도 공연팀이 회식을 한다길래 물질적으로 지원해줄 수 있도록 카드를 챙겨 왔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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