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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꿈꾸는 자들을 위해 존재한다. ①
작성 : 2013년 09월 05일(목) 20:01
[스포츠투데이 유수경 기자]
힙합은 1970년대 뉴욕 할렘가에 거주한 흑인과 스페인계 청소년들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문화 운동이다. 1990년대 이후에는 세계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문화사조의 하나가 됐다.

◇ 친숙하면서도 생소한 그 이름, '힙합'

힙합의 4대 요소는 브레이크 댄스, DJ, 그래피티, MC이다. 브레이크 댄스는 일정한 리듬에 맞춰 현란하고 복잡한 동작을 구사하는 거리의 춤이다. 브레이크 댄서들은 ‘비-보이(B-Boy 또는 B-Girl)’로 불렸는데 이것은 ‘브레이크 비트를 들으며 춤을 추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DJ는 랩 음악의 근원이며, 최초의 힙합 DJ는 자메이카 출신의 DJ 쿨 허크(DJ Cool Herc)로 알려져 있다. 그는 오디오믹서를 사용하여 두 개의 음반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그가 원하는 부분만을 계속 이어서 틀어 생긴 비트로 ‘브레이크 비트(breakbeat)’가 알려지게 됐고 이 브레이크 비트에서 힙합 음악이 태어나게 됐다.

그래피티(Graffiti)는 모든 힙합 문화와 같이 1970년대 중반 뉴욕의 흑인과 라틴계 슬럼가에서 발생됐다. 그래피티란 ‘낙서’를 뜻하지만 그래피티 아트는 일반적인 낙서와는 거리가 멀다.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은 여러 가지 색깔의 락카 캔을 사용하여 슬럼가의 벽이나 지하철 열차에다 현란하고 아름다운 그림이나 글씨 등을 그려 삭막한 도시 풍경에 신선한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또 한 가지 힙합의 요소는 MC다. 최초의 힙합 MC는 DJ 쿨 허크로 알려져 있지만, 그 전에도 음반을 틀어놓고 그 음악 위에 잡담을 하는 DJ들은 꽤 많았던 걸로 전해지고 있다. DJ들은 이런 잡담을 통해 청중들과 호흡을 맞췄고 파티나 클럽의 분위기를 고조 시켰다. 80년대 말기부터는 랩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프리스타일(freestyle)’이라는 MC 대결도 생겨났다. 이는 즉흥적으로 랩을 만들어 상대방 MC와 대결을 하는 것으로 고도의 순발력을 요한다.

왼쪽부터 SF댄스팀 조은학, 갬블러크루 박인수, 애니메이션크루 정일주, 김호철

◇ 한국힙합문화협회, '흙 속의 진주'를 발견하다.

한국힙합문화협회에서는 힙합문화컨텐츠의 고급화와 상설공연을 위해 전용극장을 건립, ‘더 퍼포머’ 공연을 앞두고 있다. 이들은 다양한 힙합문화컨텐츠를 보다 고부가가치 문화컨텐츠로 발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 협회는 우수 힙합퍼들을 전문가(문화경영, 컨텐츠제작가, 컨텐츠연출가 등)로 육성하고 지원할 계획이다. 세계적인 실력의 소유자들을 동분야의 전문인으로 양성할 때, 세계시장을 겨냥한 힙합문화 컨텐츠로 한 차원 더 높은 문화상품의 수출이 가능하기 때문. 이에 대해 문화관광체육부 등 관계기관도 적극 관심을 보이고 있는 중이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건전한 힙합문화의 보급에 힘쓰고 있는 김승기 사무총장은 “실제로 국내에는 힙합분야에 관심 있는 매니아층이 대략 1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며 “전세계 어디를 가던 힙합퍼 특히 비보이, 팝핀, 락킹, 비트박스 부분은 ‘코리아’를 외친다. 외국 관광객들이 국내에 들어왔을 때 대한민국에서만 볼 수 있는 우수 문화상품이 ‘비보이’로 대변되는 힙합댄서들의 공연물”이라고 설명했다.

김승기 사무총장은 처음 힙합퍼들을 만났을 때 ‘진흙속의 진주’처럼 빛나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그는 이들을 ‘다듬어지지 않은 보석’이라고 표현했으며, ‘열정과 순수함이 넘치는 친구들’이라며 극찬했다. 실제로 한국힙합협회 회원들은 폭발적인 성장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협회 출범 전 약 4년간의 임의 단체 기간을 거치며 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그때마다 회원들 하나하나가 진정성 있는 자세로 함께 해줘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며 어려움을 극복한 공을 회원들에게 돌렸다.

“사단법인 허가가 정식으로 나왔을 때, 회원들의 활동이 이제는 제도권 하에서 체계적으로 육성, 관리, 지원하는 출발선에 서게 됐음에 보람이 있었습니다. 정부 부처 내에서도 체계적인 지원과 육성이 필요함을 인지하고 도와주려던 분들이 많아 뿌듯했어요.” 힙합댄서 출신도 아니고 자칭 ‘공돌이’인 그가 이러한 일들을 이뤄 내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이는 댄서들의 열정과 실력에 반한 그가 진정성을 가지고 매진했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김승기 사무총장은 “그들의 감성이나 마음에 대한 이해 없이 단지 세계일등이라는 아이템에 대해 상업적으로 이용만 하려는 기성세대들에게 실망하면서 아이들은 그들만의 세계로 갇혀버렸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는 국위선양에 일조하고 있는 힙합 댄서들의 처우 개선은 물론 상처를 보듬어 주는 역할도 하고 있는 셈이다.

◇ 김승기 사무총장의 꿈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 가장 안타까웠다는 김승기 사무총장. 많은 이들이 협회원들의 열정과 노력, 성장 잠재력 등 여러 가지를 인정하면서도 실상에서는 외면하는 것이 쓰라린 현실이다. “삼류가수보다도 못한 경비 하에 행사출연 섭외, 진행이 들어올 때 이 아이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시장에서의 환경이 바뀌지 않는 한 청소년들의 미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죠. 힙합이 고상하고 우아한 정규 문화와 비교되는 ‘뒷골목 문화’라는 인식에 전환이 꼭 필요합니다.”

‘인식의 전환’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김승기 사무총장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우리 나라의 비보이들과 힙합퍼들에게 체계적인 교육, 지속적으로 발전 가능한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고 외친다. 그는 “과거 현대무용 역시 등한시 되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주요대학 무용과에 자리를 잡았지 않나”라며 “힙합 장르도 학과가 생겨나고, 보다 전문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승기 사무총장은 힙합 전문대학 설립에 대한 꿈도 꾸고 있다. 조금 먼 미래의 이야기지만 그에 앞서 우수 협회원들의 지원을 통해 대한민국이란 국가브랜드를 드높이고, 세계 배틀대회 우승이란 장점들을 국가적인 문화관광상품으로 승화시켜나갈 계획이다.

그는 ‘가장 전통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을 믿는다. 문화는 역동한다. 외국에서 들어온 문화라고 해도 가장 한국적인 문화로 승화시킬 때 그 가치는 상상할 수 없이 커진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힙합 댄스 분야는 이미 한국을 이길 곳이 없다. 더욱 많은 지원과 관심을 통해 ‘한국적 힙합’을 계승, 발전시킬 의무와 필요성이 우리에게는 있는 것이다. 끝으로 김승기 사무총장은 말했다. “미래는 꿈꾸는 자들을 위해 존재한다.” 확신에 찬 목소리가 그의 꿈이 머지않아 이뤄질 것을 예감케 했다.

유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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