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임시령 기자] 역사가 스포라지만, 체감되는 깊이가 다르다. 가장 비운의 왕으로 기록된 단종과 숨어살 수밖에 없던 충신 엄흥도. 숨겨진 비극을 끄집어내 어쩌면 놓쳤을지도 몰랐던 이야기를 상상력으로 그려낸다. 여기에 연기 구멍 하나 없는 배우들의 호연, 장항준 표 휴머니즘이 더해진 '왕과 사는 남자'가 여운을 남긴다.
4일 개봉된 '왕과 사는 남자'(감독 장항준)는 1457년 청령포 산골마을 광천골의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자처한 촌장 엄흥도(유해진)과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된 어린 선왕 이홍위(박지훈)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영화는 계유정난 후 이홍위가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길에 오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홍위에게 남은 이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궁녀 매화(전미도) 뿐이다. 궐밖을 나선 이홍위는 저잣거리에 걸린 잘린 목들을 보고 절망감에 빠진다.
광천골 촌장 엄흥도는 우연히 당도한 노루골을 보고 깜짝 놀란다. 끼니 걱정 없이 풍족하게 사는 노루골 주민들. 노루골 촌장(안재홍)은 이 모든 것이 유배온 양반 덕분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엄흥도도 광천골을 유배지로 만들기로 계획한다.
우여곡절 끝에 광천골이 유배지로 선택됐지만, 양반이 아닌 이홍위가 찾아오자 마을은 비상에 걸린다. 엄흥도는 폐위된 왕의 일거수일투족 감시하고 모셔야만 하는 책임을 떠안게 된다.
이홍위는 식음을 전폐하고 모든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다. 하지만 엄흥도와 광천골 백성들의 정성에 점차 생기를 되찾는다. 이홍위의 변화는 그를 유배시킨 조선 최고의 권력자 한명회(유지태)까지 긴장하게 만든다.
12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떠밀리듯 유배 간 곳에서 돌연 사망한 조선 제6대 왕 단종. 후대에는 가장 비극적인 운명을 겪은 왕으로 기록됐다. 죽음에 대해서도 여러 설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을 힘없이 죽은 비운의 왕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상황은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유배지에서 단종의 모습, 엄흥도와의 관계를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을 섞어 '성군으로서 자질이 충분했던 강인한 왕'으로 조명한다.
역사적 사료 두줄에서 출발한 엄흥도는 단종의 인간적인 모습, 성군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인물이다. '노산군이 돌아가셨을 때 엄흥도가 슬퍼하며 곡을 하고 시신을 수습했다. 그리고 숨어 살다 생을 마쳤다'는 엄흥도. 영화 속 엄흥도는 백성을 넘어 친구,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단종을 바라보며 신분을 초월하는 유대를 쌓는다. 두 사람의 관계성이 짙어질수록 감정의 진폭은 커져가고, 결말의 먹먹함은 '단순한 역사' 그 이상으로 강렬하게 다가온다.
관객의 몰입을 극대화 한 건 배우들의 역할이 가장 크다. 박지훈은 유배지에서의 피폐한 모습부터 각성한 모습까지 온몸으로 열연한다. 특히 깊은 눈빛은 단종의 에너지를 오롯이 뿜어내며 주변 분위기를 장악할 정도. 사극에서 유독 빛이 나는 유해진은 역사 속에서 뛰어나온 듯한 엄흥도 그 자체다. 특유의 위트를 잃지 않으면서 충신으로서의 마음, 슬픔과 감동을 자연스럽게 그려내며 몰입도를 이끈다.
제 몫 그 이상을 해내는 박지훈과 유해진. 두 사람의 시너지는 모든 장면을 명장면으로 만들어낸다. 많은 대사를 주고받지 않음에도 눈빛만으로 서사의 빈틈을 채운다. 결말이 유독 슬프고 먹먹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만히 서있어도 살기 어린 한명회를 표현한 유지태의 에너지도 대단하다. 왜소하고 구부정하기만 했던 한명회가 아닌, 기골이 장대하고 눈빛이 강렬한 한명회로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세조가 등장하지 않아도, 악역의 중심축으로서 카리스마를 발산한다.
저퀄리티 호랑이 CG, 예스러운 천둥 효과, 다소 뚝뚝 끊기는 연출 등 아쉬운 지점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단종과 엄흥도의 감동적인 스토리 라인과 배우들의 호연이 이를 충분히 상쇄시킨다. 역사와 결말의 여운만이 스크린을 가득 채워 먹먹하게 만든다. 러닝타임 1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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