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정예원 기자] 드라마 한 회를 보는 데 60분을 써야 하는 시대는 지났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콘텐츠 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켰고, '숏폼 드라마'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 해외에서 촉발된 숏폼 드라마의 인기는 국내 시장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숏폼 드라마'는 회당 길이가 10분 이하인 드라마를 일컫는다. 영상 길이가 2분 내외로 매우 짧은 에피소드들이 50~100회가량 구성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스마트폰을 활용한 시청 비율이 높은 만큼 가로 화면비에 비해 세로 화면비로 제작되는 작품들이 많다.
주요 플랫폼으로는 국내 최초로 론칭된 탑릴스(TopReels)를 비롯해 비글루(Vigloo), 숏챠(SHORTCHA), 숏타임(Shortime), 굿숏(GoodShort), 드라마박스(DramaBox), 드라마웨이브(DramaWave), 범프(BUMP) 등이 있다.
◆ 中·日서 韓까지…숏폼 드라마, 폭발적 성장세
숏폼 드라마의 인기는 가까운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중국 내 웹드라마의 인기가 TV 드라마를 제치고, 틱톡 콘텐츠가 큰 화제를 모으면서 시장이 본격적으로 성장한 것이다. 중국 시장조사 기관 아이미디어 리서치에 따르면 현지 숏폼 드라마 시장의 규모는 2023년 373억9000만 위안(약 7조6500억 원)에서 2024년 504억 위안(약 10조3100억 원)으로 가파르게 성장했다. 2027년에는 1000억 위안(약 20조4600억 원)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일본에서도 숏폼 드라마 시장이 계속해서 커지는 중이다.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 센서타워에 따르면 일본은 올해 1분기 숏폼 드라마 인앱구매 수익 증가율에서 57%를 기록, 중국(48%)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일본 숏폼 드라마 시장의 규모가 2023년 기준 약 3조8000억 원에 달한다고 추산한 바 있다.
해외에서의 인기는 자연스럽게 국내에도 영향을 미쳤다. 최근 몇 년간 지속적으로 성장해온 한국 숏폼 드라마 시장은 약 6500억 원 규모(카카오벤처스 추산)에 달한다. 중국과 일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작지만, 내수의 차이를 고려할 때 괄목할 만한 수치임은 분명하다.
이병헌 감독, 연하 재벌남의 첫사랑은 하우스키퍼, 이나은 / 사진=메타픽션, 굿숏, 이나은 인스타그램
◆ 비주류서 주류로…너도나도 뛰어드는 '숏폼 드라마'
시장의 규모는 제작에 열을 올리는 업계의 움직임으로 체감할 수 있다. 사극 '낮에 뜨는 달' '귀궁' 등을 히트시킨 제작사 아이윌미디어는 숏폼 드라마 '혼검:헌터스' '꿈에서 자유로' 등을 선보일 예정이다. 판타지 액션물 '혼검:헌터스'에는 아이콘 김진환과 블락비 재효, 안재모 등이, 학원 판타지 복수극 '꿈에서 자유로'에는 유선호, 여주하와 저스트비 추시우, 다이아 출신 권채원 등이 캐스팅됐다.
크레용콘텐츠는 '처첩대전' '악령의 프사' '나인투식스' '미스터리 티켓' 등 다양한 장르의 숏폼 드라마를 제작해왔다. 이 중 평범한 직장인이 타임루프에 갇히는 이야기를 그린 '나인투식스'는 오픈과 동시에 비글루 실시간 순위 3위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뤘다.
가장 눈에 띄는 제작사는 밤부네트워크다. 당초 웹드라마 제작사로 출발한 이곳은 지난해부터 '해야만 하는 쉐어하우스' '기숙학원 연애금지' '수진과 수진: 내 남편을 뺏어봐' '낮져밤이 로맨스' 등 다양한 숏폼 드라마를 선보이며 누적 조회수 억대를 기록했다. 특히 '해야만 하는 쉐어하우스'는 국내 제작사 최초로 드라마박스에서 전 세계 차트 1위에 올랐고, 인기에 힘입어 지난 9월 시즌2를 공개했다. 밤부네트워크는 최근 TME 그룹과 손을 잡고 글로벌 합작 숏폼 프로젝트에 시동을 걸었다.
방송국과 OTT도 숏폼 드라마 대전에 참전했다. MBC는 공포 토크쇼 '심야괴담회'에서 화제가 된 '살목지' 에피소드를 '사람을 먹는 늪 : '수살귀(水殺鬼)'의 원념'이라는 숏폼 콘텐츠로 재탄생시켰다. 이는 MBC가 처음으로 선보이는 숏폼 드라마로, 지난달 일본 플랫폼 칸타(Kanta)를 통해 선공개됐다.
티빙은 지난 8월 자체 제작 숏폼 콘텐츠인 '티빙 숏 오리지널'을 론칭, '나는 최애를 고르는 중입니다' '나, 나 그리고 나' '닥쳐, 내 작품의 빌런은 너야' '1도 없는 남자' '불륜은 불륜으로 갚겠습니다' 등 다양한 콘텐츠를 공개했다.
숏폼 드라마는 금융권의 홍보 수단으로도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KB국민은행은 지난 3월 인스타그램과 틱톡 등을 통해 전세사기 피해 예방을 주제로 한 숏폼 드라마 '반반하우스'를 선보였다. '반반하우스'는 공개 한 달 만에 누적 조회수 140만 회, 좋아요 7900개, 댓글 500개를 돌파하며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이 같은 움직임에 명망 있는 감독과 배우들도 반응하기 시작했다. 드라마 '멜로가 체질', 영화 '극한직업'의 이병헌 감독은 지난 4월 숏폼 드라마 '작자미상'을 유튜브 채널에 게시했다. 작품에는 유명 음악감독 이루마가 참여해 완성도를 더욱 높였다.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 '돌아와요 아저씨' 등을 연출한 신윤섭 감독 역시 제작사 스튜디오블랙홀을 설립, 지난달 23일 첫 작품으로 숏폼 드라마 '메소드'(METHOD)를 선보였다. '메소드'는 드라마박스, 드라마웨이브, 굿숏 등을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된 상태다.
그간 숏폼 드라마는 정극에서 기회를 많이 얻지 못한 신인들이 출연하는 것이란 선입견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인지도 높은 배우들도 숏폼 드라마로 영역을 확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역 시절부터 눈도장을 찍은 김향기는 지난 5월 다음 루프의 첫 숏폼 드라마 '귀신도 세탁이 되나요?'에 여주인공으로 출연, 뮤지컬 배우 강상준과 호흡을 맞췄다.
경력 25년을 자랑하는 베테랑 배우 홍수현도 숏폼 드라마에 뛰어들었다. 홍수현은 굿숏을 통해 공개된 61부작 숏폼 드라마 '연하 재벌남의 첫사랑은 하우스키퍼'(I'm Just a Maid But He Only Wants Me) 속 '문보영' 역으로 분해 열연을 펼쳤다.
내달 공개될 동명의 게임 원작 '마이리틀셰프'에는 이나은(에이프릴), 최보민(골든차일드), 윤현석(CIX), 김도아(파나틱스) 등 아이돌 출신 배우들이 대거 캐스팅됐다. '마이리틀셰프'는 웹드라마 '에이틴'으로 스타덤에 올라 '어쩌다 발견한 하루' 등 정극을 주로 해온 이나은이 처음으로 도전하는 숏폼 드라마라는 점에서 이목을 끌고 있다.
꿈에서 자유로 대본 리딩 / 사진=아이윌미디어
◆ 적은 돈으로 '한 방' 노릴 기회
이처럼 너도나도 숏폼 드라마에 뛰어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유는 다소 명확하다. '낮은 제작비'라는 커다란 강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대개 '드라마' 하면 떠올리는 TV·OTT 정극 촬영은 기본적으로 수개월가량의 시간이 소요된다. 톱 배우들의 어마어마한 출연료와 스태프 수백 명의 인건비, 음악·미술·소품·편집 등 다양한 부분에서도 비용이 발생한다. 그러나 숏폼 드라마는 빠르면 2주 내에 촬영이 종료돼 제작 기간과 비용을 대폭 줄일 수 있다. 세로형 숏폼의 경우 가로형에 비해 제작비를 더욱 감축하는 것이 가능하다.
정극에 비해 트렌디하게 다가갈 수 있는 면도 분명한 강점이다. 대중들은 유튜브 숏츠, 인스타그램 릴스, 틱톡 등의 유행으로 짧고 강렬한 콘텐츠에 익숙해지는 추세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콘텐츠를 즐기는 게 아닌, 주어진 자투리 시간에 향유할 수 있는 재미를 택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폰 하나로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숏폼의 발달은 빠르고 직관적인 도파민을 선사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길이가 짧은 만큼 SNS 등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손쉽게 바이럴되기도 한다.
신선한 페이스의 신인 배우들도 폭넓게 기용할 수 있다. 주연 배우들의 과한 출연료가 문제로 지적받는 정극과 달리, 숏폼 드라마는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캐스팅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인지도는 다소 낮지만 큰 잠재력을 가진 원석 같은 배우들로 시청자들의 구미를 당기게 할 수 있다.
IP(지적재산) 활용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점도 무기다. 숏폼 드라마는 웹소설, 애니메이션, 게임 등 타 콘텐츠와의 연결성이 커 IP 활용 범위를 넓히기 수월하다는 차별점을 가진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큰돈을 들이지 않고 1억 원 내외로 승부를 볼 수 있다는 점이 숏폼 드라마의 상당한 매력"이라며 "해외에서의 인기가 더욱 높은 만큼, 중국의 한한령이 해제되는 등 호재가 생길 경우 더욱 크게 흥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세로형 숏폼 드라마에 출연한 한 배우는 "몸을 사용하는 범위, 동선 등 촬영 방식이 기존 정극과 달라 처음엔 다소 낯설었다"면서도 "새로운 시도라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최근 숏폼 드라마가 다양한 채널에서 활발히 활용되고 있으므로, 특유의 매력을 대중들에게 더욱 알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매니지먼트 관계자 또한 "제작 편수가 늘어나면서 오디션, 캐스팅 제안이 정말 많이 들어온다. 배우 한 명이 짧은 텀으로 여러 편을 촬영할 정도"라며 "개런티는 적지만, 콘텐츠 업계가 불황에 빠진 상황 속 활동 기회가 조금이라도 더 주어지는 것은 큰 메리트"라고 전했다.
◆ 장점만 있을까…극복해야 할 난관 여럿
다만 명확한 한계점도 존재한다. 짧은 분량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아야 하는 특성상 신데렐라 스토리·불륜·치정·복수 등 자극적인 소재의 '막장 드라마'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때문에 탄탄한 스토리라인과 입체적인 서사를 찾아보긴 힘든 상황이다. 조회수만을 좇는 제작 행태는 콘텐츠 질의 저하로 이어지고, 새로운 시청자들을 확보하는 데 악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다.
높은 해외 인기에 비해 국내에선 아직 큰 팬덤이 형성되지 못한 부분도 발목을 잡는다. 넷플릭스·티빙·디즈니+ 등 OTT에 비해 낯선 채널들, 네임밸류가 높지 않은 배우들이 진입장벽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제작 환경에서의 문제도 제기된다. 숏폼 드라마의 기본 시장 경제가 '제작비 절감'인 만큼 타이트한 일정으로 촬영을 진행해 환경이 열악할 수밖에 없다. 배우와 스태프 등 인력을 소모품처럼 다루는 행태는 장기적으로 시장의 성장을 저해할 위험이 있다. 한 관계자는 "촬영 기간이 짧아 부담이 덜하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촬영에 쏟다 보니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불만이 종종 터져 나오기도 한다"고 전했다.
여러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숏폼 드라마가 콘텐츠계의 새 지평을 열고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트렌드에 발맞춰 탄생한 숏폼 드라마는 무한한 잠재력으로 대중들을 하나둘씩 끌어당기는 중이다. 콘텐츠가 가진 강점을 살리고, 약점을 극복할 숏폼 드라마계의 꾸준한 성장세를 기대해 본다.
[스포츠투데이 정예원 기자 ent@st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