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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차 매니저&시크릿 사장, 故 김태송 7주기에 [ST이슈]
작성 : 2025년 04월 24일(목) 18:47

사진=DB

[스포츠투데이 김한길 기자] 연예계의 매니저에는 크게 3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재력, 권력 등 막강한 힘으로 연예인을 제압해 마음대로 부리는 스타일. 과거에는 폭력으로 다스리는 매니저도 비일비재했다. 21세기에는 힘으로 연예인을 압도하는 매니지먼트는 거의 사라졌다. 둘째, 연예인의 비위를 맞추는 유형이다. 이게 다수이고 세 번째는 실력으로 리더십을 꿰차는 경우이다.

가수의 매니저의 경우에는 음악성 혹은 프로듀싱 능력이다. 자신이 직접 기획, 작곡, 작사, 편곡 등을 한다면 금상첨화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뛰어난 기획력을 바탕으로 그에 걸맞은 훌륭한 창작자들을 찾아 작곡, 작사, 편곡 등을 의뢰해서 곡과 앨범을 완성하는 프로듀서라면 가수가 고개를 숙이기 마련. 배우의 경우 올바른 대본을 볼 줄 아는 능력이다.

오는 27일은 한때 로엔, CJ 등이 매수하려 했을 정도로 가요계에서 입지가 탄탄했던 TS엔터테인먼트(2021년 폐업)를 설립한 고 김태송 대표가 52살로 눈을 감은 지 7년이 되는 기일이다. 김 대표는 세 번째 스타일에 올바른 인성과 겸손함으로 리더십을 차지한 경우이다. 시크릿 정하나, B.A.P 대현, 슬리피 등이 추모 글로 그의 진가를 인정해 주었다.

물론 TS는 한때 SM, YG, JYP, DSP, 큐브 등과 함께 대표적인 대형 음반 기획사로 평가되었지만 후에 악덕 3대 기획사에 이름을 올린 게 사실이다. 그러나 논란은 대부분 김 대표 사후에 벌어진 일이다. 물론 고인이 회사 설립자이자 대표 이사였기에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가요계에서는 그의 인품과 겸손함을 인정하고 칭송하고 있다.

고인은 소방차의 매니저로 연예계 일을 시작했다. 소방차는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기획형 아이돌 그룹이다. 당시 구창모, 유열, 태진아 등이 소속된 음반 기획사 한밭기획은 현재의 SM과 같은 대형 기획사였다. 이 회사는 1987년 소방차를 출범시켰다. 당시 소방차 전담 매니저는 나중에 DSP의 전신인 대성기획을 차리는 고 이호연과 김태송이었다.

그러나 소방차 해체 후 이호연은 한밭기획을 나와 1991년 대성기획을 차리면서 5인조 그룹 잼을 데뷔시킨다. 이때의 매니저 겸 프로듀서가 김태송. 이후 김태송은 소방차 멤버였던 정원관이 설립한 라임엔터테인먼트로 이적해 아이돌 그룹 i-13의 프로듀서 및 매니저로 근무하지만 이 팀이 망하는 바람에 잠시 방황하다가 2008년 TS엔터를 차린다.

그 이후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이듬해 데뷔시킨 4인조 걸 그룹 시크릿이 크게 성공했으며 3년 뒤 데뷔시킨 4인조 보이 그룹 B.A.P도 탄탄대로를 달렸다. 그러나 그 이후에 론칭한 걸 그룹 소나무와 보이 그룹 TRCNG는 앞선 그룹들에 비해 성적이 미미했다. 이때부터 회사는 하락세를 향하여 추락하기 시작했고, 궁지에 몰린 김 대표는 그런 선택을 했다.

현재 K-팝은 전 세계의 대중음악을 리드하는 선두 주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오늘날의 압도적인 팬덤을 형성하는 탄탄한 경쟁력을 갖추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 왔다. 일제 강점기이던 1926년 소프라노 윤심덕이 헝가리 이오시프 이바노비치가 작곡한 '다뉴브강의 잔물결'에 직접 가사를 붙여 취입한 '사의 찬미'가 대한민국 최초의 대중가요로 꼽힌다.

이후 우리 민족은 해방과 6·25 전쟁을 겪었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일본의 엔카부터 미국의 팝, 프랑스의 샹송, 이탈리아의 칸초네, 스페인의 파두 등 다양한 외국의 대중음악과 우리 토속 음악을 접목시켜 대중가요를 만들어 냈다. 종전 후 주한 미군이 주둔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미국의 팝이 주류가 되는 한편 환경상 엔카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미국이나 유럽의 곡을 표절했다거나 왜색이라는 논란이 자주 일었던 배경이다. 전쟁이 끝난 후 유랑 극단부터 밤무대 문화가 발달되기 시작하면서 대중가요도 빠르게 발전했다. 그런데 어느 나라이건 연예계 인근에는 '주먹'들이 기생하기 마련.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인기 가수들이 '주먹'을 매니저로 영입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게다가 한때 폭력 조직에서 연예계로 자금이 투입되기도 했다. 피해자도 많았고, 그만큼 부작용도 빈번했지만 약간의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이를테면 70~80년대 인기 가수들은 지방 밤무대 출연이 필수였는데 그럴 때 지역 폭력 조직으로부터의 피해를 막기 위해 '전국구 폭력배'를 매니저로 고용하곤 했던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할 때도 있다.

그런 면에서 고 김태송 프로듀서 겸 대표는 종합적이었다. 그는 키 160cm도 안 되는 단신에 주먹을 휘둘러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강자에게 절대 굽히는 바가 없었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겸손한 사람이었다. 초창기 TS 직원들은 김 대표의 키워드로 '겸손'을 떠올린다. 그만큼 그는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를 삶의 모토로 살았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록 그룹은 고민할 것도 없이 비틀스이다. 그 이유는 초창기 그들이 대표적인 아이돌 그룹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중반 이후 록의 거의 모든 하위 장르를 아우르는 기념비적인 두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와 'White Album'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 두 장이 록의 역사를 정리하고, 정립했으며, 매조졌다.

비틀스는 스스로 작사, 작곡, 편곡, 연주를 했다. 하지만 프로듀서 조지 마틴과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없었다면 록 역사에 가장 위대한 밴드, 가장 인기 높았던 스타로 기록될 수 있었을까? 고 김태송은 매우 왜소했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거대하다. 가요계에서 그의 이름 석 자는 보증 수표였다. 인격 면에서 160cm 미만이 아닌 '작은 거인'이었다.

공교롭게도 마틴과 엡스타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호연 대표는 수년간 코마 상태로 투병하다가 눈을 감았다. 옛말에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많아도 정승이 죽으면 발걸음이 뜸하다.'라고 했다. CEO 김태송은 안 좋은 결말을 맞았지만 프로듀서 겸 인간 고 김태송의 장례식장이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스포츠투데이 김한길 기자 ent@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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